금요기도회-275

August 9, 2019
설교자:
Service Type:

골방기도에 대하여
마6:5-8/

각 종교들마다 독특한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왜 기도의 방법이 다 다를까요? 신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구원관이 다르고 지향하는 인간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선종)/가부좌 틀고 앉아서 명상(사색)을 합니다. 화두(참선 수행을 위한 실마리)를 꺼내서 사색하다가 깨달음(각)을 얻어서 부처(각자/깨달은자)가 된다. 엄밀히 말하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입니다. 생노병사라는 윤희 때문에 생에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고통이 있는 것인데, 그 고리에서 벗어 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그러지요. 그런 해탈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그런 깨달음을 얻은 자를 부처님이라고 부르지요.
남무南無 아미타불, 남무 관세음 보살(남무는 귀의한다는 의미/귀의한다는 의미는 돌아가서 몸을 의탁, 의지함을 의미한다)=아미타불에게 돌아가서 구원을 청원하고, 관세음 보살에게 돌아가서 구원을 청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극락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주장하지요. 부처님이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 그런 신적 존재가 아니라 모든 인생들이 그런 깨달음을 가져서 부처님이 되는 것이 불교철학이지요. 그러던 불교 철학이 우리 나라로 전래되면서 토속 신앙인 샤마니즘과 연결됨으로써 극락 가는 것이 그만 일반 불자들의 목적이 되어 버렸지요.
*남묘호렝게쿄/13세기 일본에서 창시된 종파이지요. 불교에서도 이 파는 이단시 되고 있습니다. 남묘호랭교는 만다라/주문을 반복적으로 말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지요.
*TM명상(초월명상)/인도의 소 섬기는 힌두종파에서 하는 기도방법입니다. 20세기 마하리스 요기(요가를 하는 사람)에 의하여 재발견되어서 전파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음절, 혹은 두 음절, 혹은 한 단어 두 단어로 되어 있은 ‘만투라’를 반복해서 발음함으로써 새로운 의식세계로 들어간다. 우리 인생들에게 닫혀져 있는 의식을 열어 가는 작업을 하지요. 그러면서 자기의 숨겨져 있는 절대 자아를 찾아 가는 기도 방법입니다. 만투라는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것인데 비밀하게 전수되어 오고 있습니다.
*회교도들은 ‘알라 엘 알라/알라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시간 맞추어서 하루에도 여러 번 무릎 꿇고 엎드려 절(경배)합니다.
*기독인들인 우리들의 기도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세 분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관여하고 계시지요.
성부 하나님이 저 멀리 저 하늘 위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저 하늘에 올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런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내려 오셨지요. 초월-내재를 하시는 우리 하나님! 알라신은 초월은 하는데, 내재를 못하기 때문에 알라신 숭배자들이 하늘에 있는 알라를 찾아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서 우리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요.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함께 있다는 그런 의미의 말입니다. 우리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수 안으로 들어 가면 성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지요. 우리를 예수 안으로 들어 가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어떤 인생도 예수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 역사를 통하여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자리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지성.감정.의지 모두를 사용해서 우리 밖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아 가는 행동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절대 자아를 만나는 활동이 기도가 아니고, 우리 밖에 실존해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초월 명상 같은 것은 우리 인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절대 자아를 만나는 것이 그들의 기도의 목표였지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우리 밖에 엄연히 살아 있는 우리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우리의 기도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본문 6절/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은밀한 가운데 있는 분! 숨어 계시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실존해 있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살아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가 만들어 내 놓은 가상적 존재라면 예수 믿는 이들보다 더 비참한 분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안에 우리 주님이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면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갓난 아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엄마가 눈 앞에 있다가 안 보이게 되면 두리 번 두리 번 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엄마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 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한 다음에는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엄마가 눈 앞에 안 보여도 엄마는 지금 다른 곳에서 엄마의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눈 앞에 엄마가 안보여도 엄마가 없음으로 두려워 하지 않지요.

사45:15절/ 시내산에서 모세가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어두움 가운데로 걸어 들어 갔지요. 출20:21절에는 이렇게 그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그 어두움 속에 우리 하나님이 계시면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계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요청하면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요청을 거부하실 수 없으십니다. 아비가 그의 아들을 불쌍히 여김 같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로 하여금 아버지 노릇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담대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그 캄캄함 속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두려워 말고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로 나아갑시다.

ii. 타락한 기도의 방법/외식하는 기도/외식 하는 기도는 누구를 위하여 합니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입니다. 남들에게 내가 기도 대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기도하는 동안 나누어져 있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버립니다. 마음의 절반은 하나님께로 또 마음의 절반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혹은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 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방식은 서서 손을 하늘로 들고 기도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을 수가 있었지요. 이렇게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받는 상급이 무엇일까요?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의 칭찬인데, 그것이 그들의 상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상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상은 기도 응답인데, 그런 기도 응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표기도(공중기도)에 외식이 많이 들어 갑니다.
웅변조의 기도-미사여구가 가득하여서 기도 내용 파악이 힘든 기도입니다,
설교식 기도-창세기~요한계시록까지 등장하면서 기도하는 기도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듯한 기도이지요,
거미 꽁무니에서 거미줄이 나오듯이, 끊어질 듯 이어질 듯 하면서 계속되는 기도
공중 기도는 간략하고 함축되어 있는 기도이야 합니다. 한 시간 드리는 예배에서 공중 기도는 3분이면 가장 적절합니다. 우리 교회 1,2부 예배에서 대표 기도를 격주마다 장로님이 하고 있고, 격주마다는 목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공중기도는 5분을 넘으면 안됩니다. 공중기도는 기도 인도하는 그 사람의 눈으로 켐연장 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온 회중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아멘 하면서 마음을 실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고요. 만약 기도 인도하는 그 사람의 영성이 엉망진창이면 온 교인들이 그가 하는 기도의 내용에 마음을 실어서 아멘 할 수가 없지요.
대표기도 할 때에 기도의 말이 투박하고 거칠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마음과 믿음과 영성이 실려 있으면 100점입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마음이 실려 있으면 그 기도는 공동체 전체에 큰 감동을 일으키고, 그 기도는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합니다.

*어떤 집사님의 경험

iii. 특히 성도가 기도하는 것을 제일 싫어 하는 자는 사탄과 어둠의 영들입니다. 사탄과 악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도가 기도하는 것을 방해 하지요.
*기도하기 전, 기도하는 동안, 기도한 후
*땅에 있는 거룩 치고 완전한 거룩은 없다 우리는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우리보다 영적으로 강한 실존인 사탄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과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승리 할 수 있습니다.

v.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기도의 방법은 어떤 기도 방법입니까? 골방기도를 권하고 있습니다. 골방 기도는 무엇입니까? 골방은 내 보물을 숨겨 놓는 곳이기에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입니다. 골방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외식하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담겨 있는 탄식과 괴로움,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외로움 등을 모두 하나님 앞에 쏟아 낼 수 있지요. 만약에 우리 곁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시원하게 쏟아 낼 수 없게 되지요. 그러하기에 골방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애물을 없애 주기에 우리의 마음을 훨씬 쉽게 집중시켜 주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골방으로 들어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또 해야 하나요? 문을 닫으라고 했습니다. 문을 열어 두고 기도하는 외식도 있습니다. 거룩함 속에 보이는 티입니다. 문을 열어 두면 내 기도 소리가 밖으로 새 나갑니다. 내 이웃이 그 소리를 들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 위험을 없애기 위하여 문을 꽝 닫으라고 우리 주님이 명하십니다. 골방기도에도 그런 외식의 위험이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vi. 골방 기도의 적용;골방으로 들어 가라고 우리 주님이 명하셨는데, 이 말은 오늘 우리 시대에서는 마음의 골방을 만들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골방’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교제가 일어나는 자리면 거기가 마음의 골방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하게 어떤 지리적인 장소인 골방이라기 보다는 내 마음에 골방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우리 주님과 교제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실, 찬 안에서, 산책하면서, 설거지 하는 동안, 책상에 책을 보면서 연구하는 동안에도, 쇼핑몰에서 eye-shoping하는 동안에도, 어떤 사정과 형편에 있더라도 마음의 골방만 있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골방에서 드려지는 짤막한 간구를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보셨고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임합니다. 내 마음에 뭉클 뭉클한 감동이 임합니다. 그런 성령의 감동이 마음의 골방에 임할 때에 성령을 소멸치 말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기도하길 바랍니다.

vii.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8 절에는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기도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우리의 필요를 아는 분이 아니시다. 말로 표현되기 이전에 우리의 마음에 있는 소원과 영혼의 갈망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이것은 우리의 욕심에서 나오는 욕망이 아니라 보스톤에서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 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의 욕심과 탐욕을 채워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우리의 욕망과 탐욕은 채워져도 채워져도 끝이 없습니다. 채워져도 우리의 욕심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간구하기 전에 채워 주시면 좋겠는데, 왜 굳이 우리가 그것을 간구한 다음에 채워 주실까요?
viii. 타락한 부정적인 기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중언부언 기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에 신적인 존재에게 기도의 말을 많이 늘어 놓아야 신이 들어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방인의 기도/중언부언기도 그리스도인이 이런 이방인의 기도방법을 채용하여서 같은 말을 반복하여서 기도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당연히 안되지요. 예를 들면 방언을 하기 위하여 할렐루야라는 말을 수백 번 반복하게 함으로써 이상한 소리가 입에서 나오게 되면 방언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타락한 기도입니다. 방언은사는 성령이 임하므로 성령이 내 입술을 주장하기 때문에 나도 알지 못하는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내가 임의로 조작하여서 내는 소리가 아니지요.
이방인들이 하는 방식대로 기도를 길게 늘어 놓을 것이 아니라 간단 명료한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서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주기도문이지요.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예이지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참으로 간단명료하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짧기 때문에 공식적인 예배의 마침 기도로 사용하기에도 참 유용하지요.

오늘날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중언부언은 무엇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내 입에서 나오는 기도의 말에 내 마음과 심령이 실려 있지 않다면 그것이 중언부언의 기도입니다. 입술 따로 마음 따로의 기도입니다. 따로 국밥이라는 말이지요. 국 그릇에는 국이 담겨 있고, 밥그릇에는 밥이 따로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국밥은 국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을 국밥이라고 말하지요. 국 따로, 밥 따로를 따로 국밥이라고 말하지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기도/마26:44/같은 말로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중언부언 기도?
*바울의 세번 기도/고후12:8/ 바울도 자신의 약한 부분, 고통스러운 가시를 제거 해 달라고 세번이나 간구했습니다. 이것도 중언부언기도?
같은 말로 세번 이나 간구했지만, 거기에 심령을 실어서 했다면 그것은 중언부언의 기도가 아닙니다. 말이 적고 투박한 말투일지라도 우리의 마음과 심령이 실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