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61

April 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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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몸의 부활;

부활절이 지났습니다. 부활절이 지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오순절 즉 성령 강림절로 가야 합니다.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본 자들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예수는 범죄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반면에 성령은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이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눅11:13절/<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구한다는 것은 요청한다, 간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지요. 성령은 예수와 동일 본질이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스승이신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 가신 후에 예수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기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 예수께서 보내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 없이도 자신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자기가 볼 때에는 자신이 멋진 신앙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영적으로는 거지 생활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맞게 될 성령강림절은 부활절 후 언제이지요?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즉 7번의 주일을 지난 후에 맞게 되지요.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은 영혼불멸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 자들이라고요? 몸의 부활을 믿는 자들입니다. 헬라 철학은 사람은 영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분설로 규정합니다. 우리 인간의 영은 땅에 사는 동안은 육이라는 감옥에 제약을 받아서 사는데, 죽음을 거치면 영은 감옥 같은 육신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영혼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우리의 영혼이 이전에 가졌던 육신을 다시 찾아서 살아나는데, 살아난 그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종착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록 죽어서 썩어질 수 밖에 없는 육신 가운데 살아 가지만, 우리는 이런 육신을 넘어서 있는 불멸의 육신으로 덧입혀 지기를 소망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이런 연약한 육신 가운데 있기 때문에 헐떡거리면서 살기에 확실하게도 영으로 존재하는 천사보다는 못하지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체를 갖게 될 때에는 천사보다 우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활할 때에 어떤 몸을 가지게 될까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장래에 갖게 될 몸을 예수의 부활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도 부활하기 전에는 자신의 썩어질 육신에 제약을 받았지만, 부활하신 후에는 시공간에 지배를 받지 않는 불멸의 몸으로 다시 살아 났습니다. 우리의 썩어질 몸도 역사의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그렇게 변화됩니다.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사도 신경의 신앙고백에 맨 마지막 부분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살아난 그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지요. 우리는 영과육이 결합된 전인, whole person으로 영원히 삽니다. 다시 살아난 후에는 영과육이 다시는 분리되는 고통을 겪는 일이 없어지게 되지요. 구약 신학은 우리 인간을 영과육이 결합된 전인으로 이해하는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 헬라 이방 세계에 이 복음을 전하다 보니 영과 육, 혹은 영과 혼과 육으로 인간을 나누어서 이해하게 되었지요.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서구 사회는 인간을 이분법으로 이해 해 오다가 최근 들어서는 다시 일원론, 인간은 영과육이 결합된 전인으로 보기 시작했지요. 인간은 영과육이 결합된 전인으로 두 번 다시 영육이 분리되지 않는 그 몸으로 영원한 세월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인간론입니다.

 

몸의 부활! 주위에 운명하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몸의 부활을 소망하면서 그것이 참 기다려 집니다.

빌3:21절/<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tapeivnwsi" (천한)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o}" metaschmativsei to; sw'ma th'" tapeinwvsew" hJmw'n suvmmorfon tw'/ swvmati th'" dovxh" aujtou', kata; th;n ejnevrgeian tou' duvnasqai aujto;n kai; uJpotavxai aujtw'/ ta; pavnta.

 

우리가 어디를 가는가? 종착역, 목적지를 아는 것은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가 몸의 부활이다.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그 목적지를 향해 걷느냐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그 목적지를 향하여 걷고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와 함께 걷지 않습니다. 마호메트와 함께 걷지 않습니다. 또한 석존과도 함께 걷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자신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시키실 능력이 있는 예수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1. 구원의 확신;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은 명멸하는 빛과 같습니다. 밝게 비추는 동안은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빛이 꺼져 있는 잠시 동안은 구원을 못 받은 것처럼 느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은  깜박 깜박 거리는 빛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할 때에는 확실히 구원 받은 것 같은데, 유혹과 시험을 당하여서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할 때에는 내가 나락에 떨어져 있는 것 같고, 진짜로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유혹에 빠져서 그리고 시험에 들어서 죄와 악을 범하고 있을 때에도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은 내 감정에 의하여 좌우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롬11:29절/<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은사들은 복수형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수형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신 선물들과 부르심은 후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후회 하시는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선언되었는데, 하나님의 은사들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문맥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유대인들을 세상 많은 민족 중에서 선택하여서 자신의 친 백성으로 불러서 축복하고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불러서 친 백성으로 삼으면서 무엇을 주실 까요? 영적인 은사들을 풍성하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은사들을 사도 바울은 롬9:4-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요: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유대인들은 아무 자격 없어도 그냥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택함을 입어서 그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을 신약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불러 주실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부르시면서 무엇을 주실까요? 영적인 은사들을 주십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은사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방언과 예언 신유 축귀 같은 신비 체험의 은사들도 있고요,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그런 일반적인 은사들도 있고요,

또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와 같은 직책의 은사들도 있지요.

 

우리들 중에는 많은 은사들을 받은 분들도 있지요.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던 그날 하나님이 적어도 하나 이상이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은사를 선물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동의하시지요! 나는 그런 은사를 못 받았는데요 하시는 분들은 영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살펴 보십시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가 눈에 확 들어 올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없는 하나님이 나를 예뻐하시면서 내게만 주신 그것, 그 은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하던 상황은 유대인들이 예수와 십자가의 복음을 반대하면서 핍박하던 상황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유대인의 불순종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다른 민족들보다 먼저 사랑했던 유대인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했는데, 지금 하나님의 뜻을 거슬린다고 하여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사랑을 철회하거나 저버리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또한 과거에 나를 사랑해서 주었던 선물을 현재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선물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닙니다. 선물 주었다가 빼앗아 가는 사람이 제일 치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치사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한번 관계가 맺어지면 그 관계는 결코 끊어 지거나 파괴되지 않고 영원까지 지속됩니다.

 

후회함이 없다: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후회하시는가? 하나님은 실수 하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후회하시지도 아니하십니다. 후회라는 말은 인간들이 아주 자주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가 왜 그런 일을 했던고 하면서 안타까워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운전 면허를 딴 16살짜리 아들이 운전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인데, 어느 날 아빠가 차 키를 집에 나두고 외출을 했습니다. 기회는 이 때다 하면서 아빠의 차 키를 가지고 차를 몰고 시내로 내 달렸습니다. 그만 앞 차를 박아서 차를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면 후회의 감정이 들지요. 내가 왜 차를 몰고 나왔던고, 차를 몰지 않던 과거로 돌아 가고 싶지요. 그러나 돌아 갈 수 있던가요? 없지요! 만약 그 아이가 자기가 아빠 차를 몰고 나갔다가 차 사고가 나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면 아빠 몰래 차를 가지고 나갔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에 가서 후회하게 될 그런 일들을 현재에 선택하지요. 하나님도 그런가요? 아니지요. 하나님은 먼 미래의 일들도 현재에 마치 일어난 일처럼 확연하게 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생들처럼 쓰라린 마음을 달래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후회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감정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지적인 결단으로 취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하셨던 결정을 현재 시점에서 하나님이 바꾸실 때에 후회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창6:5-7절/<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한탄하다는 히브리어 동사가 오늘 본문에 사용된 후회하다는 헬라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 무엇을 후회하셨나요? 사람을 창조했는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의 창조 목적과는 정반대로 땅 위에서 오만한 마음으로 죄를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액션을 취하시겠답니까? 땅 위의 사람들을 모두 쓸어 버리겠다고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창조하시면서 인간들에게 땅 위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하셨지요.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된 행동을 저주스러운 행동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땅에서 쓸어 버리겠다는 하나님의 행동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후회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후회는 감정 표현이 없는데 의지적으로 행동 변화를 할 때에 후회한다고 말하지요. 즉 후회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전의 행동을 돌이킬 수 없다 즉 이전에 의지적으로 정했던 일을 취소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요1:11-13절/<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메시야 예수를 보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집단적으로 예수를 거부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 집단적인 거부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개별적으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여서 예수를 개인적으로 영접한 분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은 모두 누구에게서 출생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한 자들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서 살아 갑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약함 때문에 세상 유혹에 끌려서 신앙이 흔들리기도 하고요. 아니면 원치 않게도 시험에 들어서 신앙이 무너질 때도 있지요. 이렇게 신앙이 나락에 떨어져 갈 때에 무슨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취소하신 게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 된 신분을 취소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회의를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내 손을 잡아 주셨는데,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이 내 손을 뿌리치시는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서 구원 얻을 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짓는 도덕적인 죄악 때문에 결코, 절대로 우리 손을 먼저 뿌리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한 하나님이 먼저 우리가 싫다고 손을 뿌리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는 일이 무엇이라고요? 배교이지요.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믿고 따르겠다는 것이 배교입니다. 하나님과 한번 관계가 맺어 지면 영원까지 갑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은 연합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이 연합은 그 어떤 세력도 그것을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롬8:38-39절에 명백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롬8:38-39절/<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선대하는 영적인 실존이나 혹은 우리를 대적하는 영적인 실존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님에게서 떼어 낼 수 있는 그런 실존은 없다는 말입니다.

 

부부관계는 후천적으로 맺어진 관계이니, 살다가 마음이 안 맞으면 그 관계는 깨어져서 이혼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남남이 되어 버리지요. 그러나 부자 관계는 다르지요. 이 관계는 태어났기 때문에 생득적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안 깨어지지요. 아무리 자식이 문제를 많이 일으켜도 부자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서로가 안 본다고 하더라도 누구가 누구의 아들인 관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친자 관계가 맺어진 것은 결코 끊어 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세상 사는 동안 적어도 이런 확신을 가지고 한 세상 살아 가야 할 것입니다.

 

요5:24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e[cei,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e[rcetai,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metabevbhken>

 

당신은 어느 언덕 위에 올라 서 있는가? 이 편 언덕 위에 있는가? 아니면 저 편 언덕 위에 있는가? 이 편 언덕과 저 편 언덕 사이에는 큰 골짜기가 놓여 있지요. 구원은 이 편 언덕에서 저 편 언덕으로 건너 가는 일입니다.

영생을 얻었고, 현재형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현금의 세상에서 영생을 얻어서 가지고 있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동사의 꼴은 현재형이지만, 이것은 장래에 받게 되는 지옥에 떨어지는 일을 가리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현재 완료 시제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 세상 언덕에서 저 세상 언덕으로 넘어 가 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어디 가 있다고요? 우리의 영혼은 이미 생명 세계에 들어 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우리의 몸이 이 땅에 있는 고로 우리에게는 유혹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영원한 생명을 사탄 마귀는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 갔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 팀 앞으로!>

골3:3절/<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가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이기에 사탄 마귀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