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72

July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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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말씀은 바이러스다! 지구상에 있는 바이러스, 박테리아, 곰팡이-3대 미생물/바이러스라는 놈은 참 이상 야릇한 세균입니다. 생체 밖에는 무생물인데, 생체 안으로 유입되면 증식하는 살아 있는 생물이 되지요. 하나님 말씀도 그렇지요. 우리의 심령 밖에 있을 때에는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책-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그냥 활자로 되어 있는 인쇄물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 오면 꿈틀 꿈틀 거리면서 살아서 움직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 온다는 것은 우리가 그 말을 믿음을 가지고 우리 안으로 받아 들이면 그 말씀은 생명체가 되고 인격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바이러스다! 나쁜 바이러스가 아니고 좋은 바이러스입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고 살아 있다. 그리고 마치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양면검처럼 예리하여서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을 찌르고 쪼개기까지 한다는 말이지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는 이분법이니 삼분법이니 하면서 분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전부, 비록 육신적인 부분과 비 육신적인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은 간여하신다는 말이지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을 때에 활자로 되어 있는 성경책일 때에 인가요? 아니면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있을 때인가요? 내가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 들일 때에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활동하신다는 말입니다. 찔러 쪼갠다는 말은 심령 수술을 의미합니다. 심령에 응어리를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심령이 깊고 깊은 상처로 찢어져 있기도 합니다. 돌처럼 단단한 덩어리나 혹은 찢어져 있는 것을 마음의 상처라고 사람들이 부르지요. 그 상처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못 살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각종 문제를 일으키지요.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치유해야 할 필요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 상처가 우리 인생들의 삶을 그렇게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는 그 말씀을 내가 내 마음 속에 받아 들이면 그 말씀은 이제는 더는 활자로만 존재하는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서 활동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처럼 강단에서 귀로 들려지는 말씀이 마음에 감동을 주기에 그 말씀을 받아 들이면 그 말씀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덩어리를 그 말씀이 찔러서 쪼개면서 외과적인 수술을 하지요. 또한 깊이 패인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꿰매면서 치유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만져 달라고 기도하십시요. 우리 하나님보다 우리의 마음을 더 잘 만지시는 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시107:19-20절/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서 그들을 고치시는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 속에 내재되어 있는 능력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부르지요.

2. 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인 내가 걸어가야 하는 의의 길이 어떤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 들어 갈 때까지 고난과 환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23;3/ 여기서 말하는 의의 길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의의 길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시는 길들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길들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게는 어떤 길이 나의 best일까요? 현재 내가 걷고 있는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의의길이라고 하여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른 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세상 번영인 부귀 영화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부귀 영화 높은 지위, 명예(탄탄대로)를 가지고 믿음의 길을 걸어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들은 그런 세상 것을 누리면서도 의의 길을 걸어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또한 니고데모처럼 말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생 동안 병치레를 하면서 의의 길을 걸어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생 동안 손 대는 일마다 실패를 통하여 고난을 받으면서 의의 길을 걸어 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한 평생 감옥에 갇혀서 살기도 하고요. 그에게는 그 길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자의 걷는 길들은 달라도 골인 지점에서 예수 믿는 우리들은 모두 만나게 됩니다. 목자장 되시는 우리 주님이 그 골인 지점에 우리에게 주실 면류관을 들고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목자가 되어 주셔서 우리의 구원 완성을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달리기를 하는데, 세퍼레이트 코스를 달리도록 되어 있는 달리기를 합니다. 우리의 앞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달려 가는 달리기 말입니다.

3. 하나님 손에 잡히게 하소서!
시139:7-10/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늘 높은 곳에 올라갈지라도 땅 밑 깊은 음부의 세계에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땅끝이라고 생각되는, 저 멀리 가 있을 지라도 거기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편재, 무소부재라는 말이지요. 어디서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하나님 손에 잡히면 죽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우리는 도망을 다닙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잡으시려는 의도는 우리를 잡아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잡으시려는 의도는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렘29:11절

요나의 경우:요나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싫어서 니느웨로 안 가고 어디로 도망을 갔습니까?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선가를 내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는데, 하나님이 요나를 따라 오셨지요.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게 하여서 요나를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요나가 바다 밑에까지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준비하여서 요나를 삼키게 하였지요. 큰 물고기 배 속까지 하나님은 요나를 추적했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배속에서 회개했을 때에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명하여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 놓게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요나를 바다까지, 그리고 또 어디까지 따라갔습니까? 큰 물고기 뱃속까지 따라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손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을 쳤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랬을까요? 요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냥 도망가게 내 버려 두었겠지요.

어느 대학 교수의 고백:어느 대학 교수가 중병에 들려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어떤 병실에 있었는데, 마침 나비 한 마리가 병실에 들어 와서 병실을 벗어 나려고 유리창문에 부딪쳤습니다. 그 대학 교수가 그 나비를 한 참 바라보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 나비를 밖으로 내 보내기 위하여 나비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비는 그 대학 교수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하여 유리창문 이곳 저곳을 날아 다녔습니다. 그런 실랑이 속에서 대학 교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 나비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피하여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잡아서 평안과 생명과 자유를 주고자 했는데,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요리 조리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치는 도망자였다는 생각을 나비를 통하여 알게 되었고 크게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손에 잡히십시요. 그 길이 우리의 영혼이 사는 길이고 우리의 육신적인 삶에는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내 뒤를 따라 오신 하나님; 돌이키면 우리 주님은 바로 내 등 뒤에 와 계신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지금은 불신자들일지라도 우리 주님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의 뒤에 와 계십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뒤에 와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거나 혹은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그들의 뒤에 서 계십니다. 그들이 언제든지 몸을 돌이키기만 하면 그들을 받아 주시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등 뒤에 두고 내리막길 인생길을 40년 50년을 살았는데, 만약 그가 나락에 떨어져 있다면 그가 그 내려간 계단을 되짚어서 올라 와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인생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떨어져 있는 나락에까지도 우리 주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뒤를 따라서 나락까지 내려가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락에서 돌이키면 환하게 웃는 우리 주님의 얼굴을 대면해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 주님 손에 붙잡혀서 내려 갔던 그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 오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살 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음성이 어디에서 들리는가? 등 뒤에서 들리는가? 아니면 앞에서 들리는가? 이것은 중요한 물음입니다. 하나님을 등 뒤에 두고 떠난 길 잃은 영혼들은 하나님의 음성의 그의 등뒤에서 들릴 것이고 의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앞에서 들릴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디에서 듣는가?
사30:21-22절/

4. 지금도 구원의 문은 열려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받는 것을 볼 때에 우리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의 문을 열어 두셨다고 확신합니다. 언제까지 우리 하나님이 그 구원의 문을 열어 두시려나? 문이 열리면 닫힐 때도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여전히 구원의 문이 열려 있어서 누구나 원한다면 그 구원의 문을 통하여 영생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고후6:2절/ 문이 열려 있으니 누구나 마음을 열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문이 닫힐 때를 보았습니다. 이 구원의 문이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노아 시대에 방주를 짓던 120년간은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에 들어 가자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밖에서 닫아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홍수를 피하여서 방주로 올라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렸지만, 하나님이 문을 밖에서 닫아 버렸기에 노아가 안에서 열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닫힌 문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열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에 그 기회를 붙들어야 하는데, 그 기회를 붙들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노아가 전파하는 그 메시지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식구를 제외하고 모든 인생들이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로 열처녀 비유에서도 열려져 있던 문이 닫혔지요. 한 번 닫힌 문은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미련한 그 처녀들은 등잔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도착했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열려져 있던 문으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열려진 구원의 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열심히 전도해야 하지요. 한 명이라도 더 그 문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닫혀 있는 문이 있다면 그 닫힌 문을 열어 달라고 주께 간구해야겠고요. 문이 닫혀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문을 열어 주신다면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문이 열려 있는 곳에서는 열심히 전도하여서 영혼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이곳 보스톤 땅에서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4:3절/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