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54

February 15, 2019
설교자:
Service Type:

제목:주님,나를 인도하소서!

본문:롬8:12-17

 

  1. 성경말씀? 성경이 모두 영감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책 맨 앞에서 맨 뒤까지 모든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성경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건들이 우리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고전10: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성경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가? 후세의 믿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정의해 본다면 어떻게 정의될까요? 때를 위한 때의 말씀! 성경은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롭게 들어야 할 옛 이야기! 우리들은 옛 시대의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실수하여서 실패한 일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는 겁니다.

마4: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나오는 이라는 분사는 (엨폴류오메노, 현재 분사) ‘나오고 있는’으로 번역됨이 좋겠지요/지금도 ,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 나오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이 인쇄물을 통하여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 심령을 울리면서 내 안에 들어와 박힌 말씀> 이것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살립니다. 기록된 말씀에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면 새생명이 창조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 역사!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심령을 때릴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설교자는 기록된 말씀을 성령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은 선포된 말씀을 성령으로 듣고 받아야 합니다. 오늘 자리 모임 가운데에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성경은 오늘 나를 위한 때의 말씀!

 

  1. 롬 8:12-13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것이 아니니라/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가. 성도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들이다. 양자택일:육신을 따라 사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영, 죽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 것인가? 지상의 교회는 영적 전투를 치르고 있는 교회입니다. 지상의 모든 지역 교회들은 세상과 죄와 사탄(+어둠의 영들)과 싸우는 교회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 차 있는 세상 속에 교회가 놓여 있기에 교회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영적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

 

  1.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손자 병법에 나오는 옛말입니다. 자기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요즈음은 이 말을 지피지기 백전 백승이라는 말로 재해석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백번 싸워서 백번 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백번 싸워서도 위험해 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적을 아는 것이 전쟁에서 지지 않는 비결이지요. 영적 싸움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싸움의 대상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영적인 실존들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우리의 육신과의 싸움인데, 육신은 무엇일까요? 육신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육신에서 일어나는 욕망들은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먹고 마시고, 입고 싶은 욕망, 수면 욕망, 성적 욕망, 소유욕, 권력욕, …몸에서 일어나는 욕망들이 참 많이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이런 모든 욕망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기독교가 불교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배고픔이나 목마름 이런 욕망들은 모두 neutral한 욕망입니다. 죄와 관계 없는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죽을 수 밖에 없지요. 이런 욕망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 가능한 겁니다. 만약 배고픔이라는 욕망이 없다면 밥을 먹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바싹 말라서 죽을 것입니다. 지난 번에 우울증 앓고 있었을 때에 먹고 마시고 싶은 욕망이 안 생깁디다. 이러다 죽지 싶어서 한 숟 가락을 뜨면 식욕이 사라져서 먹을 수가 없습디다. 식욕이라는 것, 이것은 우리의 몸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우울증을 통하여 알게 되었지요.

하루에 밥을 다섯끼를 먹는 형제가 목사님에게 와서 목사님 밥이 이렇게 당겨서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데, 죄 짓는 것 아니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한 밤 중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밥을 먹습니다. 식욕이 당겨서 하루에 여섯 끼를 먹어도 그것은 죄가 아니지요. 식욕은 자연적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먹고 돌아서면 배 고프잖습니까? 조선의 잘 사는 양반 계급들은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다지요. 새벽에 일어나서 죽을 먹고, 10-11시즈음에 아침을 먹고 오후에 점심을 먹고 저녁에 그야말로 진수 성찬을 먹고, 자리에 들기 전에 가벼운 간식을 먹는다지요. 가난한 서민은 피죽을 못 먹는 그런 때에도 양반들은 다섯끼나 먹고 마셨지요. 다섯끼를 먹든 여섯끼를 먹든 식욕은 죄가 아닙니다.

 

육신과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한다. 육신이 무엇인가부터 정의 해야 합니다. 그릭으로는 살크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우리들의 육 즉 flesh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은 우리의 이기적인 타락한 본성(전적 타락)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부패한 인간성을 의미한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들이 약간씩 모두다가 조금씩 타락했고 부패했습니다. 이것이 전적 타락입니다. 우리의 성품도, 인격이나 의지들,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이 모두다 조금씩 깨어지고 부서지고 이지러졌습니다. 이것을 전적 타락이라고 부르지요. 우리를 구성하는 어떤 부분도 우리들이 처음 창조될 때처럼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을 칼빈주의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인간의 전적 타락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중심에는 하나님보다는 내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나의 유익을 위하여, 나 중심적으로 움직이도록 하지요. 그것이 육신이라고 바울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은 죄악된 욕망이다. 욕망이기는 한데, 자연적인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라요? 죄악된 욕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벗어난 욕망을 말한다. 우리의 마음의 악에서 솟아난 욕망들을 가리킨다 (예)미움,증오—이것은 죄악된 욕망이지요. 남의 것에 대한 탐욕—이것도 죄악된 욕망이지요. 이런 욕망이 자라나면 도둑질을 하게 되고, 조금 나아가면 살인을 하게 되지요. 성욕도 죄가 아니지만, 바른 관계를 벗어나 있을 때에 발생하는 것은 죄악된 욕망입니다. 이것은 간음과 강간 나아가서는 살인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모두 악에서 솟아난 모든 욕망들!

 

자연인들은 육신적인 사람들인데 이런 자연인들이 예수를 그의 심령에 모신다면 육신은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은 참 뿌리가 깊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우리의 마음에 모셔 들여도 육신적인 정욕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정욕은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눌려져 있을 뿐입니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솟아 올라와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자동차 끼어들기, 선을 행하는 일, 잠이 덜 깼을 때에 옆에서 바더하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나게 되어 있지요.

이런 육신과의 전쟁은 평생 계속된다. 오늘 본문의 죽인다는 동사의 꼴이 현재형인데 현재형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동작을 의미합니다. 이 전쟁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반복되는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서 육신의 정욕이 일어났고, 그리고 취했고, 그 다음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다윗이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잘못된 관계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누를 수가 있었더라면 그런 죄를 짓지 않았겠지요.

두더지(게임):솟아 올라 오기 때문에, 방망이를 가지고 올라 오는 것을 내리치면 다시 들어가지요.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영적 전쟁을 어떤 전쟁이라고 정의하고 있나요? 성령과 육신과의 전쟁이다. 나와 육신과의 전쟁이 아닙니다. 성령과 육신과의 전쟁인데, 단지 그 전쟁터가 내 삶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길은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막힘 없이 흐르면서 싸우실 수가 있도록 나는 길을 열어만 주면 됩니다. 이것이 영적 승리의 비결입니다.

성령께 요청하기를 바랍니다:성령이여 대신하여서 육신을 제압해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13절에는 ‘영으로써pneuvmati라는 문구에서 영은 문자적으로는 우리의 영이나 혹은 성령을 가리킬 있지만, 문맥 상으로는 확실하게도 성령을 가리킵니다. 3격이어서 방법이나 도구처럼 생각될 수도 있어서 내가 성령을 사용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나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미움,증오,살인… 탐욕,도둑질…음욕,간음,강간(rape),살인…/악에서 솟아난 욕망들!

 

이런 정욕, 예를 들면 내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는 나의 이웃을 볼 때에 짜증이 나고 미움이 솟아 납니다. 이럴 때에 어떡하라고요? 내 마음에 일어나는 미움이 나쁜 감정이니 내가 내 의지를 가지고 누르고 누르면 그 미움이라는 감정이 사라지나요? 아니지요. 더욱 반발력이 세어집니다. 더욱 그 미움은 내 마음에서 솟아 나려고 용을 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욱 많은 에너지를 그 미움을 정복하는데 쓰게 되면서 내 마음은 더욱 에너지를 잃어서 평정을 잃어 갑니다. 이런 싸움은 미련한 싸움입니다.

그 미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라고요? 성령으로 하여금 그 미움을 처리하게끔 만들어 주면 됩니다. 성령이 활동하게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선포 기도 말입니다. 내가 내 속에 일어나는 미움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 때문에 일어난 미움은 내게서 떠날지어다! 이런 선포 기도를 하면 성령이 활동할 수 있게끔 문을 활짝 열어 두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자유롭게 성령께서 내 심령 깊은 곳까지 가셔서 미움의 근원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나는 힘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평정을 다시 찾게 됩니다. 성령으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만들어 주면 됩니다.  미움과 증오가 발전하면 살인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큰 죄를 막기 위해서는 내 감정 영역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증오부터 정복이 되어야 하지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라고 규정을 하셨지요.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미움과 증오를 성령이 정복하도록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예, 탐욕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이웃이 가진 것이 너무나 갖고 싶어질 때에, 가진 돈이 없다면 그것을 훔치게 되지요. 내 안에 일어나는 탐욕을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까요? 이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일어나는 탐욕을 정복하게 만들면 마음의 평정심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에 일어나는 탐욕을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이웃이 갖고 있는 것을 더 가지고 싶어 지지요. 훔친 물이 더 맛있다는 아랍속담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웃의 것을 탐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일어나는 탐욕을 정복하게끔 하면 깨끗하게 탐욕이 정리 됩니다. 어떻게? 선포 기도를 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내 안에 일어나는 탐욕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떠날지어다! 그러면 이런 선포 기도는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거침 없이 활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게 됩니다. 성령께서 탐욕의 근원을 없애 주십니다. 이런 한번의 선포기도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든 거듭 거듭 선포하십시요. 문제는 믿음을 가지고 하시라는 말입니다. 큰 믿음이 있다면 단 한번의 선포기도에도 성령께서는 활발하게 역사하시지만, 믿음이 약할 때에는 거듭거듭 선포함으로써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탐욕을 타고 역사하는 어둠의 영이 물러 갈 때까지 계속적으로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으로 하여금 내 안에 일어나는 탐욕이라는 정욕과 싸우게 하면 아주 수월하게 그런 나쁜 감정을 정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육신과 성령 사이의 중간 지대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양자택일 만이 있을 뿐입니다. 중간 지대(회색지대)는 없습니다. 흑백만이 있을 뿐,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성령과 육신의 중간 지대에서 말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세상의 정욕도 즐기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성경은 그런 회색지대를 용납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7:13-14절<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인생길은 두 길이 존재합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말입니다.

*신30:15<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는데, 무엇을 선택할는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를 명백히 바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24:14-18/여호수아가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길 것인가? 선택하라고 요청하지요. 자신과 자신의 집안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선포하지요.

우리는 부단히 육신의 편에 서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육신의 편에 서면 사탄과 그의 부하들인 악령이 가세하여서 삶이 형편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 편으로 옮겨 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영적인 삶이 윤택하여지고 육적인 삶도 형통하게 되어 집니다.

 

나.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는 육신, 즉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살면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반드시는 필연적 귀결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우리의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입니다. 어떤 비유인가요? 영원한 참된 생명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예수 생명을 선물로 가지게 됩니다. 그 예수 생명이 내가 육신적인 욕망을 쫓는 생활을 계속적으로 한다면 그 생명은 계속적으로 약화되어 가면서 종내에는 그 생명이 죽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강화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요? 성령으로 하여금 내 안에 있는 육신적인 욕망을 죽이도록 만들어 주면 됩니다. 내가 성령님에게 문을 활짝 열어 주면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늑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이길까요? 내가 이 두 마리의 늑대 중에서 먹이를 더 많이 주는 늑대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쁘고 악한 육신적인 정욕이라는 늑대에게 많은 먹이를 주면 그 늑대가 나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일그러진 인격이 되어 버리지요. 반대로 선하고 착한 일이라는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그 늑대가 나를 정복하고 지배하여서 선한 일들을 이루고 내 인격은 고매한 인격이 되겠지요.

 

찬양팀 앞으로 나오길 바랍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되는 두 번째 이유는 12절에서 우리는 빚진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빚을 졌는가? 우리 주님 예수께 빚진자들입니다. 롬8:1절에서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육신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것을 위하여 육신적인 것을 희생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미국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미국시민이 해야 하는 의무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다. 기도제목/나는 왜 영적 전쟁에서 지기만 하는가? 죄악을 되풀이해서 짓는다. 좌절과 분노! 어떻게 하면 승리? 성령께서 날 대신하여서 싸울 수 있게끔 나는 그런 조건만 만들어 주면 된다. 쉬운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