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67

June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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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날 새벽 기도하러 교회 나오는데, 달리고 있는 내 차에 토끼가 뛰어 들어 와서 치였습니다. 시속 20마일로 가는데, 토끼가 갑자기 길을 가로질러서 내 차 앞을 지나 갔는데 차가 덜컹 그랬고 후사경으로 보니 토끼가 죽어 있었습니다. 주거 지역이라 시속 20마일로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토끼가 자동차 바퀴를 잘 피해서 죽지 않으리라 예상을 했는데, 그만 차 바퀴에 치여서 죽었습니다. 로드킬이 팽생 처음으로 일어 났습니다. 기분이 참 착잡합디다.
그러면서 다시금 다섯 살 때의 내 경험이 떠 올랐습니다. 5살 때 달리는 트럭 밑에 달려 들어 갔는데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자갈을 한 차 싣고서 빠른 속도로 내리 막 길을 달려 오는 덤프 트럭을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길을 가로질러 달려 갔습니다. 그만 차 밑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운전자가 내가 차 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 가는 것을 보고 급정거를 했습니다. 나는 차 밑에 들어 가 있었습니다. 운전자 아저씨가 나를 차 밑에서 끄집어 냈습니다. 그야말로 토끼처럼 죽었어야 마땅한데, 어느 한 군데도 다치지도 않았고 멀쩡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참 미스터리합니다. 요즈음처럼 트럭이라도 차체가 낮았더라면 즉사했겠지만, 옛날 GMC는 바퀴가 크고 차체가 높았습니다. 달리는 차 바퀴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날 수 있었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날 어머니한테 실컷 꾸중을 들었고, 나가 놀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지만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밖에 나가서 친구하고 구슬치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죽다가 살아 났지만, 다섯 살 짜리에게는 두려움이라는 큰 감정적인 데미지를 입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차에 치여서 어디가 부러 지거나, 뇌를 다치거나 중상을 입어야 하는 그런 사고였는데, 하나님이 터럭 하나 다치지 않게끔 건져 주셨거든요. 어른이 되어서 그 때 일을 회상해 보니 하나님이 왜 나를 그 때에 죽이지 않고 살렸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지요.

그 해답을 예레미야 1:5절에서 발견했습니다: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알았다는 히브리어어 동사는 사랑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기 만들어 지기 전부터 이미 사랑했습니다. 신약 에베소서에서는 우리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어떻게 이야기 하셨나요? 예수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우리 하나님이 언제 선택하여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게 하셨나요? 엄마의 태중에 만들어 지기 전보다 훨씬 이전에 그 일을 하셨습니다. 언제? 창세 전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 놓았습니다. 때가 되매 20세기, 21세기가 되매 어머니의 태중에 나를 지으셨고 세상에 태어 나게 하셨지요.
엡1:4-5절/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목사와 종이었기 때문에 나를 지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주께서 그 위기의 순간에 온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6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우리 주의 종으로 온전하게 사역할 수 있지요. 만약에 그 사고로 죽었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 되는 것이고, 만약에 머리를 다쳐서 정신이 온전하지 않게 되었다면 종으로 사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둠의 영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 시키기 위하여, 나를 죽이기 위하여 그렇게 덤프 트럭 밑으로 집어 넣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탄과 악령들 위에서 역사하시기에 나를 넉넉히 지켜 주셨습니다. 마치 물 가운데, 불 가운데서 구원 받은 것 같았습니다.

사43:1-3절/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 하나 하나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한 평생 이렇게 지키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이기 때문입니다. 물과 같은 시련, 불과 같은 시련의 현장에서도 넉넉하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런 믿음을 고백하고 우리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는 한 우리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버리는 일은 결코 일어 나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이어 오늘도 성령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이 성령 강림절이었습니다. 성령 강림절은 구약에서는 무슨 절기이지요? 오순절입니다. 오순이라는 말은 50이라는 말이지요. 언제부터 50일이 지난 말인가요? 유월절(무교절)이 있고 난 다음에 50일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르지요. 오순절 날 우리 주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 120명에게 성령을 집단적으로 부어주셨지요.
성령이 오순절 날 임하면서 예루살렘 모 교회가 시작이 되었지요.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한다면 교회의 시작은 시작인데, 어떤 시작인가요? 공식적인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왜 공식적인 시작이라는 말입니까? 사실 교회라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 두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지요. 교회의 정의를 그렇게 한다면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기 전에도 이미 교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 이미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더 오래 전으로 간다면 모세의 인도 하에 광야에 있는 60만명의 사람들의 모임이 일종의 광야 교회였다고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모 교회는 어떻게 다른가?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므로써 공식적으로 그 제자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120명의 예수의 제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임하였습니다. 바로 이점이 새로운 시대,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성령은 비인격적인 힘,능력,세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뭐라고요? 성령은 인격입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들처럼 지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성령은 삼위 일체 중에서 세 번째의 위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주일날 공적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 마지막에 부르는 영광송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을 찬양합니다. 성령이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그냥 힘과 능력이라면 찬양할 필요가 없지요. 막강한 힘과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성령을 우리가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그런 목적으로 사용이 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인가요? 성령은 예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높이는 그 일을 위하여 우리 인간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단히 성령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서 예수를 높이시는 일을 즐겨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뜻대로 성령의 도구가 되어 사용되어야 합니다.

보통은 성령이 방편이나 도구로 사용되는 듯이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독립적인 위격으로 사용된 용례가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곳을 한 두 군데 보면,

행8:29절에는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이 구절의 배경은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예루살렘 방문을 마치고 병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 가는 길이었는데, 그 때에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그를 만나라고 말하셨지요. 그래서 빌립이 사마리아에서의 성공적인 부흥회를 뒤로 하고 광야 길로 나아가지요. 병거 타고 집으로 내려 가고 있는 간다게의 재무장관을 만났을 때에 성령이 우리들처럼 말을 하시지요. 성령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나요? 빌립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소통가능 한 말을 하고 있지요. 성령이 인격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또 행10:19-20절에는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의 집으로 초빙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종들을 욥바에 기거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보냈지요. 두 명의 종들이 베드로의 집 밖에 당도해 있을 때에 성령께서 집 안에 있는 베드로에게 이 구절의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시지요. 두 사람이 너를 찾아 문 밖에 왔으니 의심 말고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성령이 우리들처럼 인격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겠지요.

막강한 능력과 깊은 지혜를 소유한 성령이 우리들에게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성령께 복종해야 겠지요. 우리의 우둔한 생각과 뜻을 성령께 강요해서도 안되고 성령을 이용해서도 안되지요. 우리는 성령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우리 앞에서 서서 우리를 인도하게끔 해야 하고 우리는 성령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형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성령보다 앞서지 말고,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

사도행전 16장에는 사도 바울 일행의 유럽 선교를 어떻게 시작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6-10절/

이 환상을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마케도냐인의 환상이라고 부르지요. 사도 바울 일행이 2차 선교 여행을 소 아시아 지방, 즉 지금의 터키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 중심부에 있는 브루기아와 갈리디아 땅을 지나서 무시아 앞에서 소아시아 북부 지방인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길들이 좌절되고 막혔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했나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성령이 아시아 지역, 즉 소아시아 지방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복음을 전할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표현이겠지요. 그래서 바울 일행은 답답한 마음으로 무시아에서 비두니아와는 정 반대 방향인 드로아로 내려 갔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에 무엇을 했을까요? 당연히 기도했겠지요. 아마도 철야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그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게 되지요. 무슨 환상? 어떤 마케도냐인이 환상 중에 나와서 바다 건너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바울에게 하지요. 마케도냐는 바울 일행이 지금 있는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 곳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 환상을 따라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지요. 토인비라는 역사학자는 바울의 탄 이 배를 유럽의 운명을 싣고 떠난 배라고 평가했지요. 바울이 유럽 대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가 빌립보 교회이지요.
만약 바울 일행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들어도 순종하지 않고 여전히 소아시아 지방에서 돌아 다녔다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누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나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이 항상 바울 일행 보다 앞서서 나갔고, 바울 일행은 그 성령님을 보고서 따라만 갔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유럽 대륙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집단적으로 임하시지 않았다면 복음은 온 천지로 뻗어 가지 않았을 것이고, 동시에 자자 손손에게로 복음은 전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대의 예수의 제자들로 복음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온 인류에게 주신 최대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께서 전 인류의 선물이라면, 성령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행2:38-39절/
자신의 죄를 모두 자복하고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다고 하셨지요. 무슨 선물을 주시나요? 큰 빌딩을 줍니까? 아니면 학위를 줍니까? 세상 것이 아니지요. 무엇을 주신다고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필요한 분이십니다.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헌신하고 섬긴 후에 그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공로 없지만, 우리가 우리 주님, 예수를 믿는 자가 되었기에 그냥 선물로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믿음의 손을 내밀어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성령을 받을 뿐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먼데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대인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방인들일 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기만 하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다 자백하고 예수의 피로 심령을 씻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왜 죄사함이 성령 받는데 그리 중요합니까? 성령은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하신 성령께서 죄로 인하여 더럽혀져 있는 영혼 속에는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심령 속으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국을 한 양푼 끓였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딸들에게 그릇을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국을 담아 줄려고 말입니다. 국그릇에 오물이 묻어 있는데 어떤 엄마가 아이의 국 그릇에 국을 퍼 담아 주겠습니까? 그릇을 씻어 오라고 엄마가 요구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심령 그릇을 우리 하나님이 보시면서 그 심령 그릇이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씻기어 진다면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십니다.
찬양 팀 앞으로 나오기를 바랍니다.
성령이라는 선물이 우리의 심령에 부어지게 된다면 방언도 하게 되고, 예언도 하게 되고, 신유도 나타나게 되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비 체험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에 모여 있는 우리 모두는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했습니다. 중생하므로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의 제자로서 힘차게 예수께서 부탁하신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받아야 한다고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