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71

July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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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지금도 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여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롬2:9-10절에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별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구별 없이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론적인 심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순간 순간마다 행하시는 실재적인 구원과 심판도 있습니다. 이런 실재적인 심판과 구원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까? 구원 얻었기에 그냥 해피하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심판을 받았기에 그냥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내 삶에 임한 구원과 심판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런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구원을 경험함으로써, 또한 심판을 경험함으로써 내 밖에 계시던 하나님이 내 삶 속에 들어 와서 내가 인식하고 그의 존재를 깨닫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구약 시대에 출애굽 사건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출14:4절/
출14:18절/

또한 우리의 삶에 구원이 일어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치의 병에서 신유를 경험함으로써, 또한 궁지에 몰려서 이제는 죽었구나 했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심으로써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큰 물의 세력과 큰 불 가운데 던져 졌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이런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지요.

이런 극적인 구원 체험이 없더라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부단히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숨어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경험하여서 알고 영원세계에 우리 주님 예수님처럼 영혼이 성장한 아들로 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2. 삶의 예배:변화를 받으라!
롬12:1-2절/

구약 시대에도 제사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동물제사가 있습니다. 동물 제사를 드린 다음에 삶의 현장에 돌아가서 삶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집에 돌아 가서 드리는 제사를 생활로서의 제사라고 부르지요. 우리들이 따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잘 읽지 않는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파트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이고 두 번째 파트는 삶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신약 시대의 예배도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 순서를 따라서 드리는 공적 예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예배를 마친 다음에 세상으로 나가서 실제적인 삶을 통하여 드리는 예배가 있다는 말입니다.
롬12장 1절에서 말하는 영적 예배는 후자의 예배를 가리킵니다.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소극적으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받는다는 동사의 의미는 본뜬다, 카피한다는 의미인데, 속은 그대로 있고, 겉만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외형을 바꾼다는 것은 마치 화장하는 일과 같습니다. 치장,단장,화장,위장,분장,가장,변장과 같다는 말입니다. 10대때에는 치장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20대 때에는 단장을 해야 하고, 30대에는 화장을 해야 하고, 40대에는 위장을 해야 하고, 50대 60대에는 분장,가장,변장을 해야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치장,단장,화장,위장,분장,가장,변장은 모두 본 바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면을 바꾸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세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 삶의 가치관을 본뜬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그들의 심령이 변화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 졌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 세상 가치관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심령이 세상으로 꽉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외형적인 삶의 방식이 세상에 감염되어 세상 사람들과 닮은 삶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내면은 세상 사람과는 다르지만 성도의 외면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표준적인 삶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성도의 외면적인 것도 세상을 닮아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성도가 세상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소극적으로는 세상을 본 받아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는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속, 즉 심령이 변화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겉이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속이 변형된다고 할 때에 쓰는 동사입니다. 우리 주님이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형될 때에 바로 이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화 되는 것은 겉만 변형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이 겉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는 예수의 신성이 변모산상에서 드러났습니다. 당시의 영적인 스승인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심이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심령, 우리의 내면 세계는 변화를 경험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변형된 내면 세계의 본질이 어두운 세상 속에 드러나야 합니다. 무엇을 통하여 그런 변형을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가 있겠습니까? 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 냄으로써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세상 가운데서 삶을 통하여 드러내야 하는 예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주목해서 볼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지요.
마5:16절/
착하고 거룩한 행실이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요즈음 예배의 갱신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입에 올려 왔습니다. 공적 예배 방식이나 형식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가 예배에서 은혜를 체험하는 것 아닙니다. 진정 공적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체험 하기 위해서는 한 주간 세상을 살아 나가면서 우리의 삶이 예배의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한 주간 거룩하고 착하게 말씀을 따라서 예배의 삶을 살다가 주일날 공적 예배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주간 동안 하나님과 신앙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주일날 습관적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니 예배에 은혜가 임하지 않지요. 예배에 은혜가 임하지 않으니 그 다음에는 불평과 불만이 놓아지지요. 예배가 왜 이 모양이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 형식을 바꾸자니, 찬양이 문제라느니, 설교가 지루하다느니, 온갖 불평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삶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공적 예배에 들어가게 하면 예배의 시작부터 은혜가 쏟아 부어지지요.
예배의 갱신은 한 주간 동안의 세상살이가 바뀌면 일어 납니다.

3.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 살면서 받는 고난 대하여. 예수를 믿는 데 왜 고난이 있는가?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입니다.
욥4:7-8절/
이 말은 욥의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진술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지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데, 엘리바스는 욥에게 욥아 네가 현재 당하는 그 고난은 너의 죄 때문에 생긴 일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이 핸들 할 수 없는 그런 환난과 시련을 겪는다면 한다는 소리가 ‘전생이 내가 무슨 죄를 이리 많이 지었기에’라고 푸념을 하지요. 지은 죄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는 것은 신앙인이건 아니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죄와는 상관 없이 우리들에게 임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내리신 고난이지요.
벧전 2:19-20절/
이런 고난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다면 결코 당하지 않을 그런 고난이지요. 예수 믿는다는 그런 고난 때문에 당하는 치욕을 우리는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런 치욕 당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가 오히려 은총의 때라는 말입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예화:모래 위의 발자국
출19:4절?
신32:9-10/
신33:27/
요일5:18/

풍랑(순풍이든 역풍이든)없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가 가장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습다. 돛단배에 가장 좋은 상태는 배 뒤편에서 불어 주는 순풍이 제일 좋고, 그 다음에 배 앞에서 불어 오는 역풍입니다. 그 역풍 때문에 배가 뒤로 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삼각돛을 이용하면 배는 지그재그 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순풍도 역풍도 없는 무풍일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이 순풍을 맞이하여서 손대는 일마다 형통하게 될 경우에 우리의 믿음이 크게 자라납니다. 또한 시련과 고난을 맞이할 때에도 우리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자라납니다. 우리의 삶에 평안하고 안일할 때에 우리의 영혼은 잠을 자면서 영적인 성장이 후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평안하고 안일한 상태가 1년 2년, 10년 20년 계속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후퇴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러므로 안일한 상태가 계속될 때에는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야 우리의 영혼이 잠을 자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