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74

August 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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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징계 없는 신앙 생활이 있을 수 있을까? 징계는 반드시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세상에서 천사들처럼 죄 짓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들은 죄악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면서 삽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 때문에 징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성도는 징계는 받으나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징계 후에는 반드시 회복이 따른다.
만약에 죄를 범하고 잘못 된 길을 걸어 가고 있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히12:8절/ 징계를 받아서 매 맞은 자리가 쓰라리고 아프지만, 영적으로는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것 때문에 위로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징계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의 영혼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열매를 가득하게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히12:11절/ 징계를 통한 연단은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의 삶에 무슨 열매? 의와 평강의 열매! 이것이 징계의 유익입니다.
그럴지라도 징계는 아픕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 하시되 너그럽게 해 달라! 하박국 예언자처럼 징계 히옵시되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탄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부정적인 면은 아프다는 점이고, 밝은 면은 그 징계를 통하여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과 딸이라는 확신입니다. 따라 합니다:나는 징계는 받았으나,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아니한다.

2. 지난 주 금요일 날 예수는 나에게 무엇 무엇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지난 시간에는 예수는 내 영혼의 구원자, 예수는 나의 죄를 속하는 속죄자, 예수는 내 질병을 치유하시는 치유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에 대하여 몇 가지를 더 알아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는 나의 부활이다, 부활신앙/무슬림들은 알라의 예언자, 모하메트가 죽어서 들어간 무덤을 크게 만들어서 섬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는 죽은 자의 무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빈무덤을 자랑합니다. 예수는 죽어서 돌 무덤에 들어 갔다가 살아서 돌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죽었던 그 몸으로 다시 사셨지요. 그러나 변화된 몸으로 다시는 죽지 않는 불멸의 몸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9월달부터 수요일 밤에 기적에 대한 성경공부를 개설합니다. 신구약에 수록되어 있는 기적을 찾아서 연구하면서 교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기적이 참 많이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빼 버리면 성경책 앞뒤의 가죽만 남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그런 기적들도 우리 주님이 행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께서 땅에 계시던 때에 행하신 기적은 치유이적, 축귀이적, 급식이적, 자연이적, 소생이적, 징벌이적 이런 정도로 분류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사건도 이적인데, 이것은 그 어떤 케티고리에도 들지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온 우주 안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기적과는 비교가 안되는 유일무이한 완전히 새로운 기적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나사로처럼 소생한 것이 아니지요. 예수의 부활사건은 변화된 몸으로 불멸의 몸으로 다시 살아 남으로 다시는 죽지 않는 그런 몸으로 덧입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체처럼 우리들도 역사의 종말의 날에 다시 살아 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혼 불멸이 고울이 아니라, 몸의 부활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몸의 부활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아 왔고, 현재도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조롱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셔서 우리들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있을 나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요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맨 끝에 붙어 있는 우리 주님의 물음이 참 중요한 물음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자신도 주님과 똑같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 속에서 자신의 부활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고울은 영혼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예수는 나의 부요함이다./ 이 부요함이 영적인 부요함만을 말하는가? 아니다. 육신적인 부요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난 고난, 시련 시련이라는 말을 늘 상 들으면서 우리는 신앙생활해 왔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고난 당하는 것을 일상으로 여깁니다. 그럴지라도 하늘나라 들어가는 권세를 받았으니, 땅에서는 나사로처럼 고난과 시련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영적인 풍요로움도 누리고 또한 물질적인 부요함도 하나님이 누리게끔 하나님이 계획해 놓았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고난을 밥 먹듯이 살게끔 설계 해 놓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고후8: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i. 하나님 나라의 왕자인 예수는 어디까지 얼마나 낮아 지셨나요? 구유에서 나셨고, 집도 없었고, 무덤도 자기 무덤이 아니고 빌린 무덤에 장사 되었지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은 겉옷 하나 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한마디로 말한다면 걸뱅이였다.
ii.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나라의 왕자인 예수께서 그렇게 낮아지고 가난하게 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주를 따르는 주의 제자들이 땅에서 부요함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하여 라고 오늘 본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인 부요함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함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그렇게 가난하게 낮아 지셨다는 말입니다.
iii. 돈이 필요하고 물질이 필요한 분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시어 가난하게 되심은 나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했사오니 이 시간 우리 주님 내가 가난하고 헐 벗었고 부족하오니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소서 라고 간구하십시요.
iv. 가난하고 부족하던 우리들이 예수 믿음으로써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부요한 우리들이 이제 우리 자신을 비우고 가난하고 낮아지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에 있는 가난하고 병들고 가련한 자들을 부요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목적은 무소유(수도원에서 선서하듯이)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삶을 살라고 부를 주셨다. 우리가 피땀 흘려서 번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청지기 사상을 실천할 때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갑니다.

삭개오의 구원/눅19:1-10절
삭개오가 변화되는 사건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리고에서 바디매오의 눈을 띄운 사건이 일어난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맹인인 바디메오가 눈을 뜬 사건은 공관복음 모두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회심은 오직 누가 복음에만 실려 있는 사건입니다. 나사로의 회심은 십자가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리고에는 큰 세관이 있었는데, 삭개오는 그 세관의 수장이었습니다. 왜 세리들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을까요? 세리라는 말에 늘 같이 붙어 다니는 말이 있었습니다. 세리와 창기! 이 두 단어는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죄인을 가리킬 때에 사용되는 대명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왜 세리들이 그런 대우를 받았는가 하면 이들이 로마 당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세금을 착복했기 때문입니다. 할당제! 그래서 세리들은 재산을 많이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들을 욕하면서도 은근히 돈 많은 세리들을 부러워 했다는 것 아닙니까?

삭개오가 여리고의 세리장으로 있었을 때에 예수께서 여리고를 방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이번이 마지막 방문입니다. 삭개오가 이전부터 들어 오던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시는 길목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 가 앉아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랬지요. 에수께서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뽕나무로 가셔서 삭개오를 만나시지요. 그리고 삭개오에게 그의 집에 머물러 쉬시겠다고 요청하지요.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하게 내려 와서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들어가서 융숭하게 접대 했습니다. 집에서 우리 주님은 삭개오에게 말씀을 전하였을 것이고 그 말씀은 삭개오의 마음을 만졌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심령 깊은 곳에 있는 눈물과 상처를 만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삭개오의 삶에 큰 변화가 찾아 오게 되지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8절 말씀을 한 번 읽어 봅니다: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구제 하는데 사용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 만나기 이전에는 돈을 모아 놓는 일에 열심을 다했는데, 이제는 쌓여 있는 돈을 바르게 사용하겠다는 말입니다. 누가는 삭개오를 통하여 선한 청지기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겠는가?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자 말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오랜 시간 제자 훈련을 거친 다음에 일어난 결단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으로 만나게 되자 그의 가치관이 드라매틱하게 변화 된 것이지요. 이전의 그의 삶의 목적은 어떻게 돈을 많이 벌어서 축적해 놓는가에 있었지만, 지금 예수를 만난 후에는 그 돈을 어떻게 값지게 사용할 것인가에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할 준비된 그릇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려는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돈은 많이 벌어서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텅텅 비어 있습니다. 또한 키도 작고 볼품도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늘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심령을 치유 받았습니다. 현대를 살아 가는 우리들도 예수 만나기 전의 삭개오와 비슷하지 않던가요?
가진 것이 많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힘들고, 힘과 능력과 지혜가 부족하여서 늘 열등감에 시달리고, 실패와 좌절을 맛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인간 관계가 깨어짐으로 힘들고, 인생의 쓴맛을 맛 보면서 살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약점과 허물이 내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거침돌이 되고 장애물이 되었지만, 오히려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우리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런 약점과 상처들이 치유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실패와 좌절이 없었고, 내 인생이 성공 일변도로 달리고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내 인생에 예수라는 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자 즉각적으로 변화 되었고, 이런 즉각적인 삶의 변화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칭찬하면서 축복했습니다. 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누구나 손가락질 하던 죄인의 대명사이던 세리, 그것도 세리장인 삭개오가 선민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삭개오만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가족들 모두에게도 임하였습니다.
예수를 만난 후에 삭개오의 삶에 대하여는 성경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 만난 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직장을 그만 두고 재산의 절반을 곧 처분한 후에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을까요? 성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목도하고서 실망해서 믿음을 떠나 버렸을까요? 성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면 삭개오가 무척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사람이라서 예수를 만나는 현장에서는 말로 재산의 절반을 구제하겠다고 했는데, 하룻 밤 자고 나니 마음이 바꾸어서 구제를 말 한대로 못한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면 여전히 삭개오가 여리고 세관의 세관장으로 앉아 있으면서 세관의 일을 계속해서 보았을까요? 만약 그가 여리고 세관장이라는 직업을 포기 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관의 일을 보았다면 그가 어떤 세관장이 되었을까요? 세례요한이 세리들에게 말한 대로 눅3:12-13절에는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삭개오는 여리고 세관에서 달라진 모습으로 한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유랑 제자로 사도들처럼 예수를 따른 자가 아니라, 정착 제자로 예수를 섬기면서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을 것입니다. 변화된 삭개오의 삶은 여리고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다음에도 여리고의 세리장으로서 빛을 발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장 삭개오를 으로 놀렸을 것입니다. 세리라는 직업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것이 나쁜 것이지요.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에, 요즈음의 말로 그의 삶을 정의하나다면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로서 한 세상 멋지게 예수의 제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 켐연장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도 세리장 삭개오처럼 이런 평신도 전문인들로 살아야 하기 않겠습니까?
찬양 팀 앞으로!
마태, 즉 레위는 가버나움 세관에 있었을 때에 우리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자기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라 다녔지요. 유랑제자가 되어서 자신의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마태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에도 여전히 세관에 남아 있으면서 예수 믿는 세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서 예수의 정착 제자로서 한 세상을 멋지게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