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79

September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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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모든 성도들이 말씀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금요기도회에 와서 말씀 듣는 시간에 들어 오지 않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서로 서로 권면해서 말씀 듣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가위: 한은 크다는 말이고, 가위는 중간을 의미하지요. 8월의 한 가운데 있는 날을 의미합니다. 1월에 있는 정월 대보름과 8월에 있는 한가위가 우리 민족에게는 큰 명절이지요.
추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송편입니다. 송편 먹으신 분? 미국 땅에서 송편을 먹었다는 것은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그림 속의 떡! 그냥 그림을 보면서 먹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가정에서 못한다면 교회에서라도 하면 좋을 텐데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언감생심! 어찌 그런 마음을 감히 먹을 수 있으리요!

회개:삶의 변화가 한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가 과거에 했던 회개가 참된 회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세형 이라는 인물 아시냐요? 대도-큰 도둑! 작은 도둑은 좀도둑이라고 부르지요. 깡패가 되려면 깡패 두목 조폭 두목이 되어야 하고, 도둑이 되려면 좀도둑이 되지 말고 대도가 되어야 지요. 조세형은 현재 나이가 81세, 한창 나이 일 때에 부유층과 권력층을 상대로 전대미문의 절도 행각을 벌려서 대도, 즉 큰 도둑이라는 별칭을 얻었지요. 이 양반이 회개하고 안수 받고 목사까지 되었었지요. 그러나 최근에 나이 81세에 이번에는 좀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철장 신세를 졌다는 군요. 예수 믿고 회심했지만, 계속해서 도둑질을 하면서 감옥에 들락날락한다. 무엇 때문일까? 도둑질이 중독 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했지만 그 회개를 지속시킬 힘이 없기 때문에 옛날로 돌아 갔다는 것이다. 이런 회개는 반쪽 짜리 회개이다. 순간의 감동으로 회심을 하기는 했지만, 이전의 죄악에 대한 쾌락을 끊어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옛날로 돌아 간 것이지요.

ST;양 도둑이 아니라 성자다.
옛날 미국에서 오래 전에 서부 개척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한적한 마을에 양 우리에서 양이 한 마리씩 두 마리씩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순번을 정해서 도둑을 잡기 위하여 불침번을 섰습니다. 한 밤중 즈음되어서 양우리를 넘어 가는 세 개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세 사람을 잡고 보니 마을에 살고 있는 세 명의 청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세 명의 청년들의 이마에 ST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한 청년은 너무 부끄러워서 자살을 했고, 또 다른 청년은 부끄러운 나머지 마을을 떠나 버렸습니다. 나머지 한 청년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도둑질을 부끄럽게 여겼고, 이제부터는 그리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마을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청년이 달려가서 도와 주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갔습니다. 수 십 년이 흐르자 이 청년도 나이가 들어서 노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옛날에 그 청년을 알고 있던 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노인이 된 그 청년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ST라는 글자의 의미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옛날에는 ST가 sheep theft 양도둑 이었지만, 옛 일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는 ST가 saint로 읽혀 졌다는 말입니다. 마을 안팎에 어려움을 당한 이들 곁에는 늘 ST가 이마에 새겨져 있는 그 분이 있었기 때문에 ST를 saint 성자로 이해를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회심은 회개를 경험한 사람이 변화된 삶을 계속적으로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예화입니다. 한번의 감정 변화로 예수를 믿고 회개를 했지만, 옛날을 못 잊어서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지요.

장애물 경기;
신앙생활은 달리기와 같다고들 하지요. 어떤 달리기? 42.195km마라톤 같은 장거리 달리기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신앙의 달리기가 시작되지요. 골인 지점인 천국 문을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려 가는 길이 무엇이라고요? 신앙의 길입니다. 그 골인 지점에는 우리 주님이 면류관을 들고 서 있습니다. 달리기를 완주하는 나의 머리에 씌워 주실 면류관을 우리 주님이 친히 들고 계시지요. 어떤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면류관도 종류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고별 설교를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하게 되지요.
사도행전20:23-24절/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 지방에서 복음 전파하는 선교 사역을 자신이 달려갈 길이라고 묘사하고 있지요.
디모데 후서 4:7-8절/
다멕섹 도상은 바울의 삶의 터닝포인트입니다. 그는 거기서부터 네로 황제에 의하여 참수 당하는 그날까지 신앙의 달리기를 쉬지 않고 했었지요.

달리기 경기 가운데, 장애물 달리기 경기,huddle경주가 있습니다. 장거리 마라톤 경기에서는 장애물이 없지요. 그냥 잘 견디고 끝까지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장애물 경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달려 가는 앞에 장애물, huddle을 세워 놓습니다. 그 허들을 뛰어 넘으면서 달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장거리 달리기 이면서 동시에 무엇이라고요? 장애물 경주입니다. 한 평생 천국 문을 향하여 달려 갈 때에 어찌 장애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숱한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때에 사탄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낙심을 일으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못 나아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장애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들의 달려가는 앞 길에 놓은 장애물이 있고, 하나님이 내 앞에 놓아 두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장애물을 놓기도 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요.

우선 사탄이 우리 앞에 놓아 두는 장애물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장애물을 잘 극복한 사례들을 성경에서 찾아 보지요.

가버나움에서의 중풍병자 치유사역: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집에서 우리 주님이 병자를 치유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고치기도 하시고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시면서 안수하시기도 하시면서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어느 날 병자들이 방안뿐만 아니라 복도와 마당에까지 병자들이 가득 몰려 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에 뉘어서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께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은 다음에 그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우리 주님께 내렸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 중풍병자를 그 자리에서 치유하셨습니다.
만약에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이 사람 장벽 때문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 갔다면 이 중풍 병자는 치유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분들에게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주께로 나가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이런 장벽에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 장벽을 넘고 주께로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사랑하는 친구, 병들어서 침상에 누어 있는 친구를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여리고의 삭개오의 경우;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리고에는 삭개오라는 세관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큰 도시였고, 왕의 대로가 지나는 곳이라 큰 세관이 있었지요. 세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삭개오라는 세관장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곳을 지나는 예수님을 한번이라고 먼 발치에서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냥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지요. 당시에 세리들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세리들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니 더더군다나 예수는 랍비인데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요. 그래서 먼 발치에서나마 그렇게도 유명한 랍비인 예수님을 한 번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이요. 키가 작았습니다. 키가 작았기에 사람들이 가리워져 있어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로 되어 있는 길가의 뽕나무 위로 올라가 걸터앉았습니다. 예수께서 지나 가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내 예수께서 오셔서 뽕나무 위에 걸터앉은 나사로를 불러 내렸고 나사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나사로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영혼을 구원하였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웠지요.
만약 삭개오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 만나기를 접었다면 그는 두 번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번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실은 몰랐지만, 너무나도 예수님을 보고 싶었기에 사람 장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의 바디메오;
여리고에서 우리 주님이 세리장인 삭개오를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맹인인 바디메오의 눈을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에 맹인 바디메오가 예수께서 지나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목소리 높입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 지릅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다, 조용하라고 핀잔을 줍니다. 이 핀잔의 소리에는 죄인인 주제에 뭐 그렇게 떠드느냐는 소리입니다. 보통 이런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 입을 닫고 조용해 지는데, 바디메오는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눈먼 사람과 싸워서 이길 사람 없지요. 왜요? 맹인은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맹인은 싸우면 반드시 이깁니다. 바디메오의 단말마적斷末魔인 부르짖음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불을 질렀지요. 우리 주님이 그의 부르짖음과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눈을 치유하였고, 바디메오는 눈 밝은 자가 되어서 우리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지요.
만약 바디메오가 사람들의 책망과 제지에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들어서 부르짖음을 멈추었다면 그의 눈은 치유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디메오는 이번의 기회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은 몰랐지만, 그는 이 기회가 마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정복했습니다.

가버나움에서의 중풍병자, 여리고의 삭개오, 여리고의 바디메오: 이 세 사람에게는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생겨난 장애물을 무엇을 가지고 정복했나요? 그들의 가진 믿음을 가지고 정복했습니다. 장애물 앞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무슨 믿음이라고 부르나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눅17:6절/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사용하여서 기적을 이루어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작은 믿음으로 역사를 일으키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비록 100% 나 되는 순도 높은 믿음은 아니나, 그럴지라도 적어도 1%이상은 순수한 믿음이 아닌가? 그 믿음을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잡것이 너무나 많이 섞여 있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의 현 주소입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마태복음에서와는 달리 에안이라는 접속사말고 에이라는 접속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조건을 말하는 접속사가 아니고 인과 접속사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
슥4:6-7절/
큰 산? 성전 건축(포로 후 귀환하여서 유대 공동체를 재건)하는 이 일에 사탄이 이방 사람들을 사용해서 방해하는 일이 심했다. 바로 이런 장애물들이 정치지도자인 스룹바벨이 해결해야 하는 장애물이었다. 스가랴 예언자가 정치 지도자인 스룹바벨을 격려하는 말씀이다.

천국 길 가는 우리들, 우리의 일생 다 가는 동안 우리들에게도 이런 장애물이 시시때때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이런 장애물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반응합니다. 어떤 때에는 질병으로, 어떤 때에는 사고를 통하여 몸에 데미지를 입어 불구의 몸이 되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로 재정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기도 하고, 인간관계로 인하여 상처를 받기도 하여서, 추구하던 일에 돌발 변수가 생겨서 추구하던 일이 막혀 있을 때도 있고, 손과 발에 힘이 빠져서 맥없이 그 장애물 앞에 주저 앉아 있습니까? 앞뒤 전후 사방을 둘러 보아도 탈출구가 안 보입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 보십시요. 언제나 거기는 막혀 있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를 구원하는 황금줄이 내려 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그 줄을 잡고 장애물을 넉넉하게 넘어 갈 수 있습니다. 장애물을 넘어가기 위하여 장애물에 도전하기 바랍니다. 그 장애물이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사탄이 사용하는 방해물이 아니라 그것을 정복하라는 정복 신호로 받아 들이기를 바랍니다.

스패포트/19세기 말엽의 참 독실한 성도이지요. 이 분은 당시 시카고에서 잘 나가던 변호사였습니다. 부인과 네 딸과 아들 하나 있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시카고 무디 교회의 회계 집사이면서 주일 교회학교 교사였고, 무디 목사의 친한 친구였습니다.
1871년 아들이 병으로 죽고, 1873년 시카고의 대 화재로 무디 교회도 불탔고, 자신의 집도 모두 불타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와 네 딸을 유럽으로 쉬게 하려고 보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다가 선박이 부딪히면서 네 딸이 물에 빠져 죽었고, 그의 아내만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스패포드는 그에게 불어 닥친 이런 시련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사탄은 스패포드의 앞 길에 감당하기 힘든 장애물을 놓았지만, 그는 그 장애물을 넘어 갔습니다. 그는 이 시련을 견딘 후에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던지, 큰 풍파로 무섭고 두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라는 찬송가를 작사했지요.

또한 불신자를 처음으로 교회로 인도할 때에는 사탄이 제일 크게 역사할 때입니다. 불신자가 교회로 나오기로 마음을 먹던 날에 사탄은 장애물을 놓게 마련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장애물이 아니지만, 믿음이 없는 불신자에게는 조그마한 것일 지라도 그것이 교회로 나오는 데에 장애물이 됩니다. 그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교회로 나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지요. 그런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를 인도하는 사람의 중보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걸어 가는 앞길에 있는 장애물 때문에 잘 넘어지고, 한번 넘어지면 못 일어나시는 분들은 빈대에게 배워야 합니다. 왜 갑자기 빈대 이야기인가? 고 정주영 회장 잘 아시지요. 이 양반이 빈대를 통하여 칠전팔기의 정신(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난다), 혹은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을 배웠다네요!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모기와 빈대와 이’는 가난했던 시대에 우리를 참 괴롭히던 것들이지요. 고 정주영 회장도 젊은 시절에 빈대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는 군요. 모기는 날아 다니면서 우리 피를 빨아 먹고, 이는 기어 다니면서 우리 피를 빨아 먹고, 빈대는 톡톡 튀면서 우리 피를 빨아 먹습니다. 빈대는 높이 뛰기 선수이지요. 요놈들이 밤마다 고 정주영 회장을 괴롭혔는가 봅니다. 고 정주영 회장이 빈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묘안을 짜내었습니다. 그는 양동이에 물을 담아 침대의 다리 4개를 각각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러면 빈대가 오다가 양동이 물에 빠져 침대로 못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스스로 정말 기막힌 생각을 했다고 득의양양해하며 잠을 잤습니다. 그 날은 잠을 잘 잤는데, 몇 일 지나면서 또 빈대의 공격을 받았잖습니까? 그는 어떻게 빈대가 자신을 물었는지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빈대들이 천장에서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빈대들이 사람의 피를 먹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침대로 가는 길이 막히자 천장으로 기어올라 고공 낙하를 하였던 것입니다. 고 정주영씨는 이것을 보고서 빈대에게서 백절불굴의 정신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 빈대의 정신을 잘 간직하고 선교에 성공하신 분이 있지요. 사도 바울이지요.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면서 선교의 열정을 쏟으면서도 로마를 방문하고자 하는 열망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로마의 죄수가 되어서 로마를 방문 했고, 그 로마에서 복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지요. 불요불굴의 믿음, 백절불굴의 믿음, 칠전팔기의 믿음!

장애물:하나님이 우리 앞에 놓아두기도 합니다
장애물들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전유물입니다. 그러나 다른 장애물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놓아 두는 장애물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이 놓은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바른 길을 벗어난 길을 갈 때에 우리들 앞에 놓는 장애물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을 떠나서 돈을 따라서 세상 쾌락과 즐거움을 따라 간다면 하나님이 우리들이 그것을 따라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뒤에 두고 세상 애인을 따라서 가면 하나님의 질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때의 장애물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큰 손이라는 말입니다. 파멸의 길, 멸망의 길로 가는 우리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 앞에 놓아 두는 장애물입니다.

그런 장애물에 대한 생생한 예를 우리는 고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호2:6-7절/
고멜은 누구이지요. 예언자 호세아의 아내이지요. 그런데 고멜은 음란한 여인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요. 고멜이 남편인 호세아와 살다가 곁눈 질 하는 애인이 생기게 되지요. 남편을 버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애인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애인을 무엇이라고요? 자기의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고멜이 그만 늦바람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애인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이 걷는 길에 무엇을 놓았나요? 가시를 놓았고, 또 무엇을 놓았나요? 담벼락을 놓았습니다. 그러면 고멜이 애인을 찾아 만날 수 있나요? 없지요. 그 애인을 찾아 떠났지만, 돈 쓰고 시간 쓰면서 애를 썼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고멜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백성을 상징하지요. 즉 이 고멜은 신약의 백성인 우리들로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우리의 영적인 남편인 우리 주님 예수님을 뒤로 두고 세상이라는 애인을 찾아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 것인가? 그래 잘 간다. 하면서 우리들의 가는 길에 주단, 즉 영어로는 red carpet를 깔아 줄 것인가? 아니지요. 우리 주님의 영적인 아내인 우리들이 곁길, 멸망의 길로 가는데 우리 주님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지요. 그런 행동을 하신다면 우리를 관심 밖으로 내어 놓았다는 말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내로 생각하시기에 다른 애인을 찾아 나서면 하나님의 질투가 발생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가 가는 앞 길에 장애물을 놓는다는 말입니다. 그 장애물을 통하여 우리가 가는 길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장애물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큰 손입니다.
내 걸어 가는 앞길에 장애물이 나타나면 기도하고 그 장애물이 사탄인 놓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 하나님이 놓은 것인지 분별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욕심과 탐욕에 이끌리어 세상 길로 가고 있는데 장애물이 생기면 그것은 물어 볼 필요 없이 하나님이 놓으신 장애물입니다. 이런 장애물을 사탄이 내 앞길을 막기 위하여 놓아 두었다고 오판하여서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상처만 깊어 집니다. 영의 눈을 뜨고서 내 길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턱 놓여 있게 되는 장애물의 성격을 파악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파악이 되었다면 기도를 해야 하는데, 기도가 달라지겠지요. 사탄이 놓은 것이라면 하나님께 극복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놓으신 것이면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찬양시역팀 앞으로!
고멜이 이런 장애물 때문에 곤란을 겪자 그 다음의 행동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이 잘못 되었음을 발견합니다. 이전의 남편이 좋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남편인 하나님께 돌아 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에 장애물을 놓는 이유는 우리가 걷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는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길 잘 가는 사람 앞에 놓이는 장애물은 사탄이 놓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길을 가는 사람에게 놓이는 장애물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돌이켜서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당신 앞에 지금 놓인 장애물은 어떤 성격의 장애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