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80

September 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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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교제는 사귐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fellowship이라고 하고, 그릭으로는 koinonia라고 하지요. 성도가 하는 교제는 두 개의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는 위에 계신 주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갖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적으로 성도들간에 일어나는 관계입니다. 성도들간의 교제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위한 선행적인 관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끈끈한 교제가 먼저 맺어지지 않고서는 성도들간의 교제는 일어 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가운데 일어나는 교제는 동호인 클럽이나 동아리 모임에 불과하지요. 교회가 예배 드리기 위하여 모여들었다가 예배가 마치면 음식을 나누거나 손 잡고 안부를 묻거나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교제 없이 썰물처럼 교회를 떠난다면 교회는 보링하게 되고 드라이해지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교회 공동체는 힘을 잃어 버리고 죽어 가게 되지요.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중요합니다. 사도 신경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나와 있지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사역:선포(케리규마), 교육(디다케), 교제(코이노니아), 선교와 구제, 기도 사역 etc.

*고전1:9절/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교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자기 아이가 자기 아이보다 못난 아이들과 어울려 논다면 기뻐하겠는가? 어떻게든 자기 아이보다 더 나은 아이와 어울려 놀기를 바라지요. 자기보다 못한 아이와 놀면 싫어 하면서 못 놀게끔 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못난 우리들을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서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과 같이 사귈 수 있게끔 허락해 주셨습니다. 왕자와 거지의 사귐!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요? 미쁘신 분이시다. 미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미쁘다는 것은 밉다는 말도 아니고 이쁘다는 말도 아니고 무엇이라고요?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변함 없이 우리를 신실하게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못나고 무식하고 이기적이고 어두울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더러울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과 우리들이 사귀는 것을 제한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자기의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를 종처럼 부리기 위해서 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자기의 제자 12명을 선발 할 때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3:13-15절/
12제자들은 그들이 원해서 예수를 스승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원하셔서 많은 무리들 중에서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을 선택한 목적이 무엇이라고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인데, 그 일을 하기 위한 조수들로 제자들을 사용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지요. 귀신을 쫓는 권능을 줄려고 부르신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그저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자기 곁에 열 두명의 제자들이 있기만을 바랐습니다. 왜요? 열둘을 사랑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12명을 사랑했는데, 자기의 목숨을 내 줄 정도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냥 그 열 두 명이 예수 곁에 있는 것으로 너무나 행복해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도 행복하지만, 더 큰 행복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 곁에 거느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사랑하였으므로 행복 하였노라!
교제,친교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빵과 커피! 빵을 뜯어 먹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앉아서 대화 하는 것을 연상하지요. 또한 밥을 먹는 공동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연상하기도 하지요. 예배 후에 친교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합니다. 교회 와서 예배 드리지 않고 딴 짓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그렇다면 교회 와서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나요? 안됩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본질적인 일이 또한 친교입니다. 공동식사인 친교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 서로를 섬기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나의 이웃 속에 있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이웃을 존대하면서 내가 힘을 다하여 나의 이웃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식사 문화에는 밥을 먹으면서 대화하기가 서구식 식문화보다는 참 어렵습니다. 사실 서구 식 문화는 예를 들면 스테이크를 먹을 때에 그냥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 우물 씹으면서 커피나 콕을 마시면서 얼마든지 입으로 대화가 가능합니다. 한국 식문화는 조금 다르지요. 밥을 입에 넣으면 그 다음에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밥을 입에 넣어서 씹고 있을 때에 무엇이 함께 들어가야 하나요? 반찬이나 국이 입에 같이 들어가서 섞여야 목구멍으로 넘어가지요. 그래서 그런지 한국 식문화에서는 먹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밥을 한 숫가락 입에 넣은 다음에 반찬으로 젓가락이 가서 반찬을 입에 넣어야 하고, 반찬을 입에 넣으면 씹으면서 밥과 반찬이 입안에서 섞어야 하고 그리고 얼른 목구멍으로 삼켜야 하고요. 그래서 우리 식 문화는 밥상 머리에서 이야기가 잘 안됩니다. 밥을 한 그릇 먹는데, 아주 바쁘기 때문입니다. 비빔밥이나 김밥은 그래도 먹으면서 대화하기에 덜 불편합니다.

친교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친교는 근본적으로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Give&take! 내 것을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이 친교이고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드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교제를 하게 되지요. 사람과의 친교에서도 서로 주고 받는 데, 이것을 영어로는 share한다라고 말하지요. 나에게 풍부하고 넘쳐 나는 것을 나의 이웃에게 주고, 내 이웃은 내게 없는 자신에게 있는 풍부하고 넘치는 것을 내게 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있는 근본 정신입니다.

예루살렘 모교회는 돈이 없는 가난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은사인 복음과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이방지역에 생겨 나고 있는 이방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모 교회는 자신들이 먼저 깨달아 안 복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방 교회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이방 교회들이 자신들이 넘치게 가지고 있는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모 교회로 보냈습니다. 이것이 교제입니다.
고전16:1-4절/

고린도 교회가 헌금을 매주 조금씩 모아서 그것을 구제 기금으로 예루살렘 모 교회에 보냈습니다.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겠다! 너희의 은혜가 무엇인가? 매주 모아둔 구제 기금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은과 금인데, 이것을 옥수수와 같은 곡물로 바꾸어서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 모 교회는 고린도 교회에 무엇을 보냈다고요? 영적인 은사들을 보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 기금을 받은 후에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사들을 그들에게 부어 주시도록 기도했겠지요. 또한 이방의 사도인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통하여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후8:14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후8:14절/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이렇게 그들 각자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서로간의 교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나 고린도 교회나 모두 유익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Win-win!

교회와 교회, 공동체와 공동체 간에 주고 받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제는 성도들 각자가 서로 주고 받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 개인간이 일어나야 하는 교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갈6: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평신도들을 가리키지요. 이런 평신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분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코이노네오라는 글자인데, 이 말은 코이노니아의 동사꼴입니다. 교제하라는 말이지요. 말씀 사역자는 말씀을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물질로 반드시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교제는 중요합니다. 서로 서로 간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