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90

December 6, 2019
설교자:
Service Type:

금요기도회-290
일시:12/6/2019

예수는 누구인가?-예수에 대한 신앙고백!
마16:13-17(20)/
우리의 신앙고백:예수는 주,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12제자를 대표하여서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 말은 ‘당신은 그리스도이고,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면서 베드로를 칭찬하셨지요. 베드로가 말했던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헬라어인데, 이 말은 히브리어 메시야를 번역한 말이지요. 히브리어 메시야는 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상 끝에 메시야를 보내서 그를 세우고 그에게 기름을 붓는다고 예언했습니다. 기름 부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메시야가 누구라고요?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조상적부터 기다려 오던 바로 그 메시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말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첨가된 이 문구가 의미가 있는 문구입니까? 예,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라는 정치적 메시야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사람들은 열심당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조국 유대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사명에 불타는 사람들입니다. 열심당원 중에는 타락한 열심 당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유대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그런 메시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메시야를 정치적 메시야라고 부르지요. 그들은 유대 평민들을 선동하여서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반역죄로 로마 군대에 체포되어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였지요.
베드로가 했던 신앙고백은 예수는 그런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무슨 메시야라고요? 메시야긴 한데, 무슨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 즉 영적 메시야를 의미하지요. 베드로는 메시야 뒤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예수님은 영적인 메시야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유대를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독립시켜서 해방시킴으로써 정치적인 자유를 가져다 주는 그런 메시야가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 인생들을 죄와 사망과 영원한 심판인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영적이면서 보다 근본적인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야입니다.
예수를 이런 메시야로 볼 수 있는 눈은 어떤 눈?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실 때에야 비로소 예수를 이런 메시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눈을 가진 분들이 복된 분들입니다. 엡1:17-19절 지혜와 계시의 영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셨기에 성령께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마음의 눈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안이라고 부르지요. 육신의 눈과는 다른 차원의 눈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영안, 혜안이라고 부르지요. 영적인 눈이 어두운 우리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비로소 밝은 눈이 되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2:3절
저주할자? 헬라어로는 아나테마!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것을 본 사람들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 많이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아직 한 세대도 다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무에 달려서, 십자가 형으로 처형되는 자는 모두 저주 받은 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 보는 사람들은 예수는 저주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주님입니다. 주라는 말은 그릭으로 큐리어스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지요. 또한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시민들이 그들의 황제를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어두운 영안을 밝히실 때에 비로소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가 우리 주님이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지난 2천년간의 교회 역사에서 교회 회의는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에 대한 위격은 321년 니케아 종교 회의를 거쳐서, 451년 칼세론 종교 회의에서 결정되었지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사 본질이 아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짝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명품을 베껴서 만든 명품 비슷한 물건을 짝퉁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짝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시이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예수는 양성을 가지고 있다. 신성과 인성! 신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완전하고, 인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완전하다. 신성은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다. 예수는 우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우리와 똑 같은 분이십니다.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과 한 본체 안에서 보전되고 함께 역사한다. 두 본성은 연합되었는데, 두 본성은 섞이거나, 변화하거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God-man이다.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시다. 신성과 인성이 서로 섞여서 이상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 검정색과 흰색이 섞이면 회색이 되지요. 검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닌 것이 회색입니다. 우리 주님은 회색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즉 인간보다는 뛰어나고 하나님보다는 못한 그런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는 육신을 입고 있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의 인성;
/예수의 인성에 대한 증거를 신약에서 찾아 봅시다. 예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똑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1:14절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成肉身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했고, 또 다른 말로는 ‘도성인신道性人身’이라는 말을 쓰지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사건은 2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예수께서 인간 비슷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우리와 똑 같은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리와 똑 같기에 우리와 교감할 수 있는 분이지요. 성서는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나 무엇이 없다고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히4:15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르면서 예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2:5절
사도 바울도 예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예수의 인성이 부인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역사적 예수가 부인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는 2천년전에 이 땅에 살았던 실존적인 인물입니다.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이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하여서 지금까지도 있어 왔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 때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참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사상은 육체는 더럽고 악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참된 인성을 가지고 올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성경과는 다른 사상입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울기도 했고, 피곤해 하기도 했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습니다.

예수의 신성;
/육신을 지니신 예수께서 또한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 봅시다. 예수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고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인간들이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많이 있어 왔습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신성에 대하여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도마가 만났을 때에 도마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어떤 신앙 고백을 했습니까?
요20:28절
이 고백은 우리 주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만진 후에 도마가 했던 멋진 신앙 고백이지요. 이것을 우리 주님이 거부했나요? 아니지요. 그의 신앙 고백을 accept했습니다. 도마의 신앙 고백이 잘못되었다면 우리 주님이 그것을 교정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것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행동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도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 요청에 대하여 우리 주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대답하셨지요.
요14:9절 하시면서 그것이 믿어 지지 않거든 무엇을 가지고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을 통하여 예수의 말이 참됨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당시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던 병자들을 치유했고,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였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켰고,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걸으셨고, 죽은 자들까지도 살려 냈지요:나인성 과부의 청년을 살려 냈고, 12살난 야이로의 딸을 살려 냈고, 죽은 지 4일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 냈지요. 이런 엄청난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모노게네스 ‘하나님의 아들’인데,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생물학적인 아들로 출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셨다 라고 신약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일하게 태어난, 단 하나의 아들! ‘예수는 나신 아들’ 모노게네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요1:14,18절,요3:16,18절,요일4:9-요한 문서에서 4번 나온다. 예수 믿는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다른 관계를 우리 주님 예수님은 하나님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포했다.
요8:58절 영어로 표현하면 before Abraham was born, I am!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은 항상 존재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가 없었던 시기(때)는 없었다는 말이지요.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기 이전에도 존재해 있었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 1장 1-3절까지에 의할 것 같으면 말씀으로 존재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보다 2천년전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2천년 후의 말씀의 성육신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영어로는 I am! 입니다. 원래는 완전한 문장이 되자면 보어가 있어야 하는데, 보어가 없이 가 사용될 경우를 이라고 부르지요. 구약 성경인 출애굽기 3:14에서는 하나님을 라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요. 이 문맥은 모세가 하나님께 자신들의 조상적부터 섬겨 오던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에흐에흐(I am, 그릭으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알렸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 예수께서 바로 이런 성스러운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 자기의 Id, 즉 신성을 알리는데 사용했지요. 그랬더니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야 말로 싸늘했습니다. 어떤 정도로 싸늘했습니까? 유대인들이 59절에 의할 것 같으면 돌을 들어 칠 기세였습니다. 왜요?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미치광이 취급을 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이렇게 극렬하게 화를 냈을까요? 이들은 어떤 영적인 토양에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유일신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여호와 한 분 외에는 다른 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신교(여러 신들이 존재한다:만신전)라는 영적인 토양에서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큰 충격이 아닙니다. 너도 신이냐, 나도 신이다라고 주장 할 수 있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런 신관 속에서 라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격이라고 말한다면 신성모독으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지요.

요한 복음 10장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에서 자신과 성부 하나님은 하나라고 확실한 주장을 했습니다.
요10:30절 하나님과 자신은 또 같은 본질을 가진 분이라고 선언했지요.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아버지와 인간 아들은 같은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과 침펜지는 서로 다른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 본질입니다. 이런 선언이 어떤 영적인 환경에서 주장되었습니까? 다신교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신이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어디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지배하는 유대 사회에서 우리 주님이 자신은 여호와와 동등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입니다. 만약 다신교가 지배하는 그런 사회였다면 예수도 그런 만신전에 모여 있는 신들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회에는 유일신 사상이 주장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여호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들은 가짜이고 거짓된 신입니다. 이런 영적 환경에서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고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면서 자신이 신성을 굽히지 않고 주장했습니다.

요한 복음 8장에서도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했습니다. 요8:24(28절에서도)절
여기에도 보어가 없는 의 절대 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구절이지요. 예수께서 하나님 되심,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닥칠 끔찍한 운명이 무엇입니까? 너희 죄 가운데 죽는다. 즉 자신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이단들 중에는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신앙을 따라 하나님을 믿고 섬겼지만 죽은 다음에 예수에게로 갈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라는 말입니다(대표적인 현대 이단:여호와의 증인). 예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죄사함에 대하여 자신도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마가복음 2:1-12절에 기록되어 있는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서 우리 주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했지요. 그리고 나서 그 사실이 참된 진리임을 보이기 위하여 그 중풍 병자를 깨끗하게 고쳤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에 실려서 들어왔지만 나갈 때에는 그가 자신이 누웠던 상을 들고서 걸어 갔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모여 앉은 무리들 중에는 성경을 잘 안다는 서기관들도 앉아 있었는데, 서기관들이 마음 속으로는 예수가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를 사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람하게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청년 랍비가 하나님처럼 인간의 죄를 사한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요한 복음 8장에도 간음한 여인에 대하여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지요: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자신이 죄 지은 인생들에게 벌(심판)하실 수가 있는 분이라는 것은 함축하고 있는 말씀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요 5장에서 심판하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이라고 묘사되어 있지요. 산 자와 죽은 자들 모두를 심판하실 수 있는 재판장이십니다. 요5:26-27 사도 베드로도 이 사실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행10:42-43

마28:19절-대사명 구절인데, 여기에는 삼위가 동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삼위가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예수는 반인, 반신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임을 우리는 세상에 천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는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아 마땅한 삼위 일체 하나님 중에 제 2위에 있으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찬양사역팀 앞으로!
예수는 주! 예수는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칭호를 구약의 성도들이 여호와의 대체명으로 사용했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이라는 칭호를 예수께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황제에게 로마의 시민들이 주라고 불렀는데, 초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로마의 황제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원형 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 죽어 가면서 예수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야입니다. 영원무궁토록 존귀와 영광을 우리 주님 예수께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