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95

January 10, 2020
설교자:
Service Type:

금요기도회-295
일시:1/10/2020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소서! 사람 낚는 어부는 사람들의 어부 라는 말이지요. 물고기 잡는 어부는 산 고기를 죽이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죽은 영혼을 잡아서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을 전도자는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생명’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낚시질을 잘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낚시질도 기술입니다. 입질이 올 때에 타이밍을 잘 맞추어서 낚아 채야 고기를 잡을 수 있지요. 입질 할 때의 기회를 놓치면 고기를 못 잡지요.

딤전3:16절/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이것은 일종의 찬미가(hymn)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가사에 음악을 넣어서 불렀던 찬미가인데 교리가 들어 있는 찬미가이지요. 성육신과 승천이 나타나 있지요.

예수께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 지게 되었다.  수동태 과거이지요. 예수께서 세상 가운데서 믿어 지게 되었다. 하늘로 올려 지시기 전에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게 되었다. 현재는 16억명이 예수님을 믿고 있지요.
당신은 왜 예수를 믿는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어떤 분들은 믿고 싶으니까 믿는다 라고 말한다. 믿고 의지할 대상이 없다면 그야 말로 마음을 둘 데가 없어서 마음이 안정이 안되기 때문에 내 인생의 버팀목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요. 이런 의도로 예수 믿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믿어 지니깐 믿는다 라는 답이 가장 적절한 대답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복음을 들을 때에 이상하게 내 마음이 끌리면서 믿어 집니다. 그래서 믿고 있지요. 이것이 최상의 대답입니다. 목사인 저도 예수님이 믿어 지니깐 여지껏 믿고 있습니다.
신앙은 지성적인 이해를 토대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증거를 가진 다음에 예수를 믿겠다면 예수를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감동을 주실 때에는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예수를 믿게 되지요.

지성적 이해냐 믿음이냐?
구약의 백성이 모세의 영도 하에 광야 생활을 40년간 했지요. 광야 생활이 끝나갈 즈음에 구약의 백성이 에돔 땅을 빙 둘러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서 구약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뱀에 물려서 몸이 퉁퉁 붓고 아파하면서 죽어가고 있을 때에 모세에게 하나님이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지요. 그 해결책은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고 그것을 그것을 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끔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믿는 믿음이 있는 자는 장대에 매 달아 놓은 구리뱀을 보았고 뱀독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리뱀을 쳐다 보지 않았던 자들은 뱀독으로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구리 뱀 대신에 다른 것 예를 들면 황량한 들판에서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어떤 식물이 군락을 이루어서 삽시간에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여 주시고 그 열매를 따서 짓이겨서 뱀에 물린 상처에 바르면 낫는다고 하셨다면 아마도 뱀 독으로 죽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비록 구리뱀이기는 하지만 구리 뱀을 쳐다 보게끔 했기에 싫어서 안 본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뱀 보고 놀란 가슴 새끼줄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이지요. 구원은 이성적인 이해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는 받을 수 없지만 믿어 지기에 마음과 가슴으로 받을 때에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믿어 지니깐 구리뱀을 보았고 살았습니다.
복음이 믿어지기에 믿는다는 이 말에는 성령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성령 역사가 없고서는 결코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불 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처형된 예수께서 어떻게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이성적으로는 용납이 안되지만 그것이 믿어 지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는가 버림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는 지표입니다. 선택 받은 자는 복음을 귀로 들을 때에 믿음이 생겨서 예수를 영접하지만, 버림 받은 자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은 신앙이 없어서 불신 세계에 살아 가고 있지만, 그런 그 사람이 복음을 접하는 그 날에 마음이 열려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있을 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초대 교회 시대에도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행전 13장에서는 사도 바울 일행이 전도단을 꾸려서 소아시아 지방의 비시디 안디옥에 들렀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온 시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이 영접한 자들을 사도행전에서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복음이 불신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 갔더니 거부되지 않고 영접 된 것을 보니 그 사람들은 이미 우리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디언이 사는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인 이유는 옷을 공짜로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이 옷을 한 보따리 도네이션 받아서 인디언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밖의 문명 세계에서 받아 온 옷을 쫙 펼쳐 놓으니 저마다 옷을 가져가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인디언 마을에 살고 있는 백인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별로 그런 옷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 인디언들은 열광했는데, 백인들은 관심이 없었을까요? 백인들은 그 옷들이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에 비해서 크게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에 인디언들에게는 그 옷은 최상의 옷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이 자신들이 걸치고 있는 옷들은 모두 낡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펼쳐 놓은 옷들은 자신들의 옷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비교적 좋은 옷을 걸치고 있었기에 그런 자기의 옷을 벗고 그 옷을 바꾸어 입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필요한 이들은 우리에게는 의가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라는 것을 철처하게 느낀 자들이 복음을 소유하고 싶어 하지요. 내가 가진 의는 걸레 조각이라는 의식이 있는 분들은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의로운 옷이 멋있어 보여서 입고 싶어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방인들 중에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복음이 가서 닿으면 그냥 받아 들이게 되지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맨 처음 복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지요.

오늘날에는 어떨까요? 오늘 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적인 눈에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 보니 놀랍게도 그 이방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거든요. 이들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미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기회가 닿는 대로 우리는 입을 벌려서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그 가운데서 구원 얻을 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 4:2절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때를 얻을 때에는 복음 전파하기에 용이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말이고, 때를 못 얻는다는 말은 복음전파를 할 수 없는 역경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순풍이 불 때에는 돛을 단 배는 앞으로 죽죽 나가지만, 역풍이 불 때에도 배는 뒤로 밀리지 않고 앞으로 지그재그식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까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복음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믿어 지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마당발이 되어서 우리의 교제권 안에 들어 있는 불신 이웃들을 찾아 갑시다. 담대하게 입을 벌려서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게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보스톤 땅은 복음 전파하기에 용이한 곳이지요. 아무도 우리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없습니다. 대학 켐퍼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누가 제지하는 사람 있습디까? 여기 로드 아일렌드에 있는 브라운 대학에 우리 형제가 십여년 전에 켐퍼스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구내 경찰이 오더니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제지 하더라고 해서 못 전했다고 하더군요. 메사추세츠는 아직까지는 그런 박해는 받고 있지 않습니다. 열심히 전합시다!

세계선교;
온세상이 다 예수를 믿게 하려고 선교가 있는 것이다. 선교는 우리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이 선교사들을 미전도지역에까지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교의 목적이 무엇이라고요? 온 세상이 자신이 예배하고 있는 우상을 내려 놓고 참이신 하나님을 예배케 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주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시면서 자신의 뜻을 수행케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남겨 두신 들이다.

시22:27-28절/
세계 선교의 비전이 들어 있는 구약의 말씀이지요. 불신 이방 세계가 모두 우리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들이 믿고 있는 우상들을 내려 놓고 참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49:6절/
내가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지요. 그렇다면 너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스라엘 공동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한 인물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이 본문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어 집니다. 이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는 문단에서 이인칭 대명사 너는 한 인물은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해석 전승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라는 인물을 세우시는 이유와 목적은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메시야는 이방의 빛이고, 예수 메시야는 땅 끝까지 전파되어서 온 세상에 구원이 임하게 해야 합니다. 메시야를 보내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만드셨지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서 걸어 나오신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방 세계인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해 주었습니다.

구약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에도 세계 선교에 대한 예언의 말씀, 한 구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1:11절/
구약 성경 말씀도 이런 세계 선교의 비전이 여실히 나타나 있었는데, 유대 공동체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요나서 같은 말씀과 요엘서와 같은 예언서가 저작 되면서 국수주의적인 이스라엘 공동체를 책망했었지요.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구원의 복음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넘어서 온 이방 세계로 뻗어 갈 수 없었지요.

사실 신약 시대에 우리 주님의 3년간 제자들을 가르치신 사역과 또한 그가 부활하신 다음에 그의 제자들에게 세계 선교를 구체적으로 명하셨기 때문에 복음이 민족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서 땅끝까지 전파되어 나갔지요.
막16:15절/ 부활하신 후에 우리 주님이 11제자를 만나신 후에 세계 선교를 하도록 제자들에게 명령하고 계시지요.
마28:19-20a절/
행1:8절/

요즈음 ‘땅 끝 선교회’니 혹은 ‘땅 끝 교회’니 하는 명칭들은 세계 선교 비전을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선교에 초점을 맞춘 신앙이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선교를 해야 합니다. 지역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 사회에 구원의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할 뿐 아니라 해외 선교도 힘써야 합니다. 어디까지? 땅끝까지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해외 선교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관심의 영역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미국 교회가 100년 전에 운둔의 나라인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초창기의 선교사들, 아펜셀러, 언도우드 같은 선교사들, 또한 이름 없이 조선 땅에 와서 피흘려 죽은 선교사들이 미국에 평안하게 사는 삶을 뒤로 하고 해외 선교에 눈을 떴기 때문에 한국 땅에 복음이 전해 질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오늘과 같은 큰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해외 선교가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백안시 할 것이 아니고 마음을 열고서 힘써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명하셨기 때문이지요.

온 이방 세계가 거짓 된 신의 지배를 받고 우상 숭배의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파됨으로 그들의 어두워진 심령이 밝아지게 되면 거짓 된 신을 버리고, 우상을 부수어 버리게 될 것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예배가 일어 나면 따라 오는 일이 삶의 변화가 따라옵니다. 이제는 우상을 따르면서 고정 관념을 따르면서 미신을 따라서 살았지만 이제는 진리를 따라서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개인의 삶이 이렇게 변화가 되면 사회가 또한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와 불법이 난무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로 바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그런 삶의 전환이 되어 버립니다.

찬양 사역팀 앞으로!
롬1:5절/
롬16:25-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