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296

January 17, 2020
설교자:
Service Type:

금요기도회-296
일시:1/17/2020

월요일, 주님이 내 집에 오셨지만 문 앞에서 돌아가 버리셨다. “네 마음에는 아들 딸이 가득 차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화요일, 노크만 하신 주님은 발길을 돌이키셨다. “네 집은 돈으로 꽉 차 발 디딜 틈도 없구나.”

수요일, 나를 부르시던 주님은 슬픈 낯이 되셨다. “세상 재미에 귀가 먹어서 내 음성을 못 듣는구나.”

목요일, 주님은 화를 내셨다. “내가 찾아왔는데도 피곤하다고 못 본채 하냐?”

금요일, 주님은 우셨다. “뭣이? 나보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히라고?”

토요일, 거센 노크 소리와 함께 주님의 고함 소리. “이젠 나에게 문도 안 열어주느냐!”

주일날, 교회에 갔더니 주님께서 이런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날마다 네 집에 가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오늘 하루라도 잊지 않고 잠깐이라도 들러 주니 고맙구나!”

우리들 집에는 문들이 참 많습니다. 대문, 현관문,방문 등등이 있습니다. 현관문,방문은 안 열어주고 대문만 열어 준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문만 열어 드린다면 예수께서는 그냥 우리 집 마당에만 서성대시겠지요. 마당에만 계시면 비바람 찬 서리를 다 맞으셔야 합니다. 나는 따뜻한 방안에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조금 나은 분은 대문을 열어 드리고 현관문도 열어 드립니다. 그러면 집안에는 들어 오시지요. 그러면 리빙룸 소파에 앉을 수는 있지요. 나는 여전히 내 방 깊은 곳에 있지만 말입니다. 어느 집에 가던지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그 집의 침실까지 들어 가지 않지요.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그냥 우리집 손님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참되게 예수를 모시고 싶은 분들은 어느 문까지 열어 드려야 합니까? 내 방의 문을 열어 드려서 내 방으로 들어 오게 하셔서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가 일어 나야 겠지요.
당신은 예수님을 지금 어디에 모시고 있습니까? 마당에 서 있게 해서 비바람 찬서리를 맞게 하고 있나 아니면 리빙룸에서 소파에서 밤을 보내게 하고 있나 아니면 내 방 안에 들어 오게 하셔서 내 침대에 편안하게 있게 하고 있나요? 정말로 우리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모든 마음의 문들을 다 활짝 열어 놓고 우리 주님을 모셔 들이기를 바랍니다.

계3:20절/

우리 주님이 누구에게 주었나요?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노라고 하지만 세속화 되어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심령과 삶에는 예수께서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무늬만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삶에 영접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 영접해야 하는가? 예수와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들은 어떤가요? 라오디게아 교인들과는 달리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해서 우리의 마음과 삶에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한 후에 예수님을 꼼짝 달싹하지 못하도록 예수는 결박시켜 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한 후에 예수님을 골방에 쳐 넣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분들은 예수께서 골방에서 나오셔서 간섭하실 것이 싫어서 골방에 자물쇠까지 채워 놓은 분들도 있습니다.
20년즈음 전에는 한국에서 보스톤에 있는 학교로 스팩을 쌓기 위하여 포닥이나 단기 프로그램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 교회의 멤버들 중에 많을 때는 절반 정도가 될 정도였습니다. 포닥들이 한국에서 나올 때에 인천 공항의 라커에 예수님을 넣어 두고 자물쇠를 채워놓고 나온다는 조크가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1년 2년 미국에서 즐기다가 한국에 들어가고 싶은데 예수께서 따라 오시면 그것을 못하니까 예수님을 공항 라커에 가두어 놓지요. 보스톤에서 God-free라이프를 엔조이하다가 한국에 들어가면 공항 라커에 모셔 둔 주님을 꺼낸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공식 아나요? Everything-God=nothing! Nothing+God=Everything! 이 공식을 우리는 욥에게서 보지요.

요즈음 한국 땅에 이상 야릇한 사람이 하나 등장해서, 하나님 꼼짝마! 자기가 명령을 내리면 하나님이 다 수행한다 라는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마치 자기 하인 부리듯 한다고 하지요. 사이비 교주나 하는 소리를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주위를 끌기 위하여 농담조로 이야기 했다면 코메디언이겠지요. 배삼용,이기동씨 같은 코메디언이지요. 만약 바른 정신을 가지고 그런 이야기 했다면 정신과 닥터를 찾아서 진찰을 받아야겠지요. 과대망상증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제 정신으로 말했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보입니다. 코메디언이라도 문제이고, 과대망상증환자라도 문제이기에 우리 교회에서는 이 사람이 한 야리꾸리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꺼 놓고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을 왕 답게 여기지 않고 왕을 종처럼 부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예수의 왕됨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종들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왕좌에 내려 와서 예수님을 내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게 하고 내 삶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해야지요. 이런 삶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십자가 부적
삼상4:1-11절
이 전쟁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 때가 사무엘이 아직 소년 시절이었을 때입니다. 엘리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셀 근방에 진영을 꾸리고 있었고, 블레셋은 아벡이라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을 아벡 전쟁이라고 명명하지요. 전면전이 발생하였습니다. 1차 전쟁이 격돌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가 4천명이나 전사했습니다. 전장에 나갔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본영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서 패전의 원인을 분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터에 안 계셨기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결론은 바른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해결책을 내 놨습니까? 실로 성소에 안치 해 놓고 있는 법궤를 전쟁터로 보냅시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합니까? 그 법궤로 하여금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는 말을 하지요. 그리고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로 하여금 법궤를 수종들게 했습니다. 이것은 바른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법궤를 전쟁터에 들여 오니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이 전투에서 승리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2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또 패전했습니다. 그 결과는 1차전보다 더욱 혹독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더욱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육을 당하였습니다. 엘리의 아들인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2차전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블레셋 족속에게 빼았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참담한 결과가 일어났을까요? 왜 이런 결과가 일어 났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고,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이 일로 인하여 교훈을 받아야 하지요. 왜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패전했을까요?
1차전에서 패배한 이유를 이스라엘 장로들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들의 하나님께서 전쟁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전쟁터에 임하시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슨 조치를 취했나요? 법궤를 전쟁터에 모셔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지요. 이것이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장로들이 법궤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법궤는 상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상징물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가시적인 상징물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임재의 실재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무슨 신앙이라고 분류될까요? 부적 신앙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재앙을 막기 위하여 부적을 만들어서 몸에 가지고 있거나 혹은 집안에 붙여 놓았지요. 전염병이 돌거나 재난이 휩쓸 때에 그 재난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부적을 만들었고 그 부적 자체가 신통력이 있어서 액운을 막아 준다고 믿었지요. 바로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이런 천박한 영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전쟁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바른 영성을 가지고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2차 아벡 전투에서 그런 처참한 패배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차 아벡 전투에서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이 전쟁에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쟁에 함께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악과 영적 지도자들인 엘리 제사장 가문의 타락과 또한 이스라엘 장로들의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했고 어두움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다면 1차 패전 후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들과 함께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회개했었다라면 우리 하나님이 2차 전투에 개입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영적이 지도자들의 영성이 천박했기에 더욱 큰 화를 당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임재에 불과한 법궤를 전쟁터에 부적으로 썼습니다. 그랬더니 1차보다 더욱 큰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어떤 결과?
나이 많은 엘리가 패전 소식을 접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고,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 족속에게 빼았겼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 엘리가 혼절하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또한 비느하스의 처가 충격으로 해산하게 됩니다. 난산이어서 아들을 낳고는 비느하스의 처가 죽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지요. 이가봇은 영광이 없다,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아이는 참 불행한 아이이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사모하고 섬겼던 법궤마져도 블레셋 족속에게 빼았겼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 났나요? 부적 신앙 때문에 일어 난 결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이런 부적 신앙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를 부적처럼 사용합니다. 성경책을 부적처럼 사용합니다. 교회건물을 성전으로 부적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부적으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십자가로 요약이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성경 말씀의 요약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이라는 곳에서 지성을 가지고 아덴 사람들을 이성을 가지고 설득하여서 예수 믿게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하지요. 그래서 바울 일행은 고린도로 사역지를 옮겨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였지요. 거기서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금으로 된 십자가 목거리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또한 집에서도 벽에 십자가를 걸어 놓기도 하고요, 또한 교회의 지붕과 교회 본당에도 십자가는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이 십자가라는 형상을 내가 손에 들고 있거나 안 보이면 불안해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정도라면 십자가는 부적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목걸이나 형상이 없으면 불안해 지거나 잠을 잘 때에 십자가를 옆에 놓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면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것은 십자가가 부적이 되어 버린 병든 신앙입니다. 십자가가 부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십자가 뒤에 계시는 우리 주님을 신앙해야지, 십자가라는 형상을 부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를 부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은 어둠의 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묶여서 살아 갑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와 염려와 근심에 눌려서 자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지요. 저도 꼬맹이 일 때에 동네의 누나나 형들이 달걀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달걀 귀신이 특히 화장실에서 잘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 때에는 화장실이 마당 한 쪽에 끝에 있었고,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이라 어두 컴컴합니다. 밤에 배가 아파서 화장실 간다는 것은 죽음과 같습니다. 어두컴컴한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화장실 아래에서 달걀 귀신이 올라 오는 것 같고요. 또한 뒤에서 내 뒷머리를 달걀 귀신이 당기는 것 처럼 쭈빗쭈빗해 지지요. 어릴 때 꼬맹이 때에는 화장실에 출몰한다는 달걀 귀신 때문에 자유를 잃은 삶을 살았지요.
킨더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산타 할아버지는 실존인물이지요!!!
그러다가 중학교 시절이 되고 나서는 달걀 귀신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는 그 공포를 벗어 났지요. 그런데 신종 공포가 또 나를 지배했습니다. 드라큐라 영화를 몇 편 보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제후들의 소유인 큰 성에 백작이나 공작이 드라큐라가 되어서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그런 영화 말입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실제로 드라큐라가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어두캄캄한 골목길을 가야 하는 일은 죽음에 가까왔습니다. 아마도 자매들은 이런 골목길에서는 성폭행 당할까봐 두려워 하는데, 중학교 시절의 저는 드라큐라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 목을 물어 뜯고서 피를 마실까봐 두려워 했습니다. 참 어릴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지요.

찬양팀 앞으로!
세상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십자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십자가로 인한 자유와 기쁨을 누려야 참된 신앙이 됩니다.
고후 3:17절
주님은 영이시다. 주의 영?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내 삶 속에 들어와서 역사하고 활동하면 비록 내가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어떤 것도 나를 억압하거나 속박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자유가 있다. 이 자유는 폴리티칼 한 즉 정치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이 자유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세상 가운데 사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얽메이거나 억압을 당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