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나를 깨우치소서!

April 5, 2020
설교자:
Passage: 이사야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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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우리 주님 예수님의 삶을 요약한다면 ‘선 고난,후 영광’이라는 삶입니다. 선 고난 후 영광이라는 말은 고난을 겪고 난 후에 영광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후에 다시 사는 영광을 얻었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은 영광받으시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호와의 종이 누구를 가르키는가는 구약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르지만 우리들은 그 여호와의 종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를 가르킨다는 입장을 갖습니다. 이런 견해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신학적 이해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여호와의 종이 바로 예수를 가르킨다는 입장에서 오늘 본문은 해석되어서 우리들의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II. 첫째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학자의 혀와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학자의 혀와 들을 수 있는 귀란 무엇입니까? 들을 수 있는 귀란 단순히 물리적인 소리를 들어 내는 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5절에는 나의 귀를 열었다라는 표현을 썼고, 4절에는 나의 귀를 깨우치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방안에 엄마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밖 마당에는 꼬맹이들이 어울려서 놀고 있었습니다. 갑자가 어떤 엄마가 일어나더니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방안에서 수다 떨던 다른 엄마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밖에서 그 엄마의 아들이 넘어져서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울음 소리가 다른 엄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아이의 엄마에게는 확성기를 통하여 들리듯이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허공에서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친구의 말을 들을 때에, 선생이나 이웃의 말을 들을 때에 혹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의 형태로 옵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좋은 일을 통하여서, 혹은 궂은 일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있고 그런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만 하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오케스트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연주회를 앞두고 단원들이 지휘자의 지휘를 받으면서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소리를 내면서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휘자가 연습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피콜로 소리가 안 나온다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에서 나오는 소리에 작은 악기인 피콜로의 소리가 나오던 안 나오던 별탈 없을 것 같은데, 지휘자는 작은 악기인 피콜로 소리가 안 나오는 것을 잡아 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으니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는 것이겠지요. 음치들에게는 한 옥타브 높은 도나 한 옥타브 낮은 도나 모두 같은 레벨의 소리인데 말입니다.
여호와의 종이 열린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친 후에 하는 사역은 무엇입니까?
열린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학자의 혀를 가지고 지치고 피곤하고 무너진 영혼을 돕는 사역을 행합니다. 4절에는 말로 곤핍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깨우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 사역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곤핍한 백성은 누구입니까? 신의 백성이지만, 나라가 망하여서 바벨론으로 포로 신세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르킵니다. 이들은 고달픈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 예언된 말씀 그대로 우리 주님의 3년간의 공생애는 그야말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그 고통이 영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고통이든지, 아니면 그야말로 육신적인 고통이든지, 그런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치유하셨지요. 당시에 난치병이나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상한자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어떤 비방을 쓴 것도 아니고 또한 요술이나 방술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말씀으로 선포하시므로써 치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능력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병이 치유되고 사람들에게 포제스 되어 있던 귀신들이 또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3년간의 사역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구원의 사역이었습니다. 어떤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는 귀하고 값진 구원사역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들이 귀가 열려서 깨우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주위에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귀를 열어서 깨우치심은 나만이 누리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또한 곤고한 나의 이웃을 위하여 나에게 그 말씀을 맡겼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귀를 열어서 들려주신 그 말씀으로 낙심하고 좌절에 빠져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 떠는 이들을 위로할 자가 누구입니까? 삶에 지쳐 있는 이들을 누가 무엇으로 위로하여서 삶에 활력과 기쁨을 솟아나게 만들겠습니까? 이런 일은 꼭 신학을 전공한 목사들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평신도들도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기가 전등에서는 빛을 냅니다. 같은 전기가 전열기를 통과하면 열을 냅니다. 같은 전기가 선풍기에 걸리면 시원한 바람을 냅니다. 전기가 건설현장의 원동기에 연결되면 엄청난 힘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직업이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칠 때에 그 깨우침은 근원이 하나이지만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역사를 나타내면서 우리의 사회를 풍성하게 만들어 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에 반드시 고난과 시련과 박해를 당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당당하게 싸워나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하는 일은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돕는 사역인데, 이런 일을 하면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받아야 하지요.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의 일을 겪고 있습니다. 비난, 증오, 중상 모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고난은 등을 얻어 맞습니다. 태장으로 맞는지, 아니면 채찍으로 맞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만 등허리를 심하게 얻어 맞습니다. 또한 뺨을 얻어 맞습니다. 뺨을 손으로 얻어 맞는 것은 아픈 것은 고사하고라도 기분이 몹시 불쾌합니다. 또한 수염도 뽑혔습니다. 수염은 일종의 영예의 상징인데 그 수염이 잘라지거나 뽑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여호와의 종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모욕인지 모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하였지만 말없이 고난과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힘이 없고 무능하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순순히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는 길이 있었고, 또한 그 대적들을 꺽어 버릴 능력도 있었지만 우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그런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런 고난과 모욕과 수치를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감내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7절에는 여호와의 종이 그런 수치스럽고 아픈 현장에서 그의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장한 의지적인 결심을 표현해 주는 문구입니다.
과연 이 예언대로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문자 그대로 그런 고통과 핍박과 수치를 겪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갈대로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채찍질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체포와 구금 심문 그리고 고문과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많은 사람들의 고소와 고발이 따랐지만 우리 주님은 입을 떼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채찍질을 당하였습니다. 신약 성서가 증언하는대로 말입니다. 로마의 병정들의 사정없이 때리는 채찍을 40대나 맞았습니다. 그 채찍 끝에는 단단한 뼈 조각이 붙어 있어서 등허리에 채찍이 닿을 때마다 살점이 패이거나 떨어져 나갑니다. 채찍에 맞으신 후에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마침내 못박혀 운명했습니다.
왜 우리 주님이 고난을 당했는가? 우리 주님이 그런 극한적인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었을까?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런 고통에 의미가 있음을 확실하게 아셨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알았기에 그 고통을 참아 낼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죄값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값을 취르기 위해서임을 아셨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서 도무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그 모진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서 듣게 해준 말씀,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고난받고 죽으라는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예요. 순종할 마음은 있더라도 순종할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순종할 수가 없지요. 우리들은 그것을 자주 경험하지요. 너무나 나에게 들려준 말씀이 좋아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면서 이 예배의 자리에서는 순종을 다짐하지만 세상에 나가서 살아갈 때에 순종할 능력이 없어서 그 말씀을 때문에 조그마한 고통이 닥친다면 무너질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그런 큰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승리한 그 이면에는 순종할 마음뿐만 아니라 순종할 수가 있는 능력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그 순종할 능력을 받았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받았습니다. 한 밤을 지새우면서 겟세마네에서 우리 주님은 바른 사명의 길을 가기 위하여 씨름했습니다. 십자가의 무시무시한 고통 때문에 번민했습니다. 그것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하실만 하거든 이 고난의 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의 원함을 내려놓아 버리면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면서 영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기도의 승리가 있었기에 실재적인 육체적인 십자가의 고통이 찾아와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어떤 닥아올 큰 일에 대한 준비기도가 오랬동안 쌓여 있다면 실제적으로 그런 큰 파도가 덮쳐도 결코 넘어 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오랬동안 드렸던 기도는 우리의 삶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지요.

III. 말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가 노래했던 여호와의 종은 우리 주님을 가리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 종의 귀를 열어주시고 또한 학자의 혀를 주었습니다. 무엇 하기 위해서 말입니까?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와주고 위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명의 길을 갈 때에 사람들이 종을 칭찬하기는커녕 비아냥거리면서 욕하고 비방합니다. 착한 일을 하는데도 세상은 그런 종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 종은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하면서 전혀 동요하지 않고 사명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갑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비방하고 욕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때문에, 우리의 사명 때문에 우리는 애매히 고난을 당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달려 가는 길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하나님이 인정하셨기에 그 일을 당당하게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