켐연장, 맛집

February 16, 2020
설교자:
Passage: 데살로니가전서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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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구약 시대로 여행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한번 투어 해 보기로 합시다.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하기에 대단히 엄숙하고 단정하고 깨끗하리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구약시대의 성전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냄새 뿐만 아니라 또한 연기도 장난이 아닙니다. 소와 양을 성전에서 칼로 잡고 제단에 올리는데, 그런 제사가 가끔 있는 일이 아니라 매일 매일 아니 매 시간마다 드려 집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큰 restaurant이라고 말입니다. 양념한 고기를 굽는 것이 아니라 생고기를 굽는 곳이라고요. 왜냐하면 절기 때에 소와 양을 화목제로 드린 다음에 제사에 참여한 온 회중이 둘러앉아서 화목제로 드린 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성전은 큰 식당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우리 주님 예수께서 창조하신 교회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교회도 영적인 식당이고 영적인 맛집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케임브리지 연합 장로교회입니다. 우리가 지은 이름이 아니고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지어 주셨습니다. 교회의 이름이 꽤나 깁니다. 그래서 드림.비전 청년부원들은 준말을 많이 사용하지요. 켐연장! 더 짫게는 켐장으로 부릅니다. 켐연장이라고 발음해 보니 무엇이 생각납니까? 음식점, 맛집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는 복음을 요리해서 파는 맛집입니다. 보통 식당의 맛을 좌우하는 분이 주방장입니다. 켐연장 식당의 주방장은 누구입니까? 김목사입니다. 저는 성경말씀을 잘 요리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켐연장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전속 요리사입니다. 저는 말씀의 주방장으로 늘 부담을 안고 살아 가는 사람입니다. 주부들이 매일 집에서 식구들에게 오늘은 무엇을 가족들에게 해 먹일까 부담을 안고 있듯이 말입니다.
보스톤의 음식점은 맛없기로 유명하고 맛이 없으면 값이라도 싸야한데 값은 뉴욕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터무니 없이 비싼 것으로 유명합니다. 음식점의 번창하느냐 문을 닫느냐는 음식점의 생명인 맛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음식점은 소문난 맛집이 되어야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음식점은 맛이 있으면 한 번 먹어본 사람이 소문을 내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소문난 음식점이 되면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지요. 주말이 되면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게 되지요. 차를 가지고 있기에 식사하러 맛집을 찾아서 한 시간을 드라이브해 간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아깝지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돈 내고 맛없는 동네의 음식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들더라도 차를 타고 소문난 맛집으로 가게 되지요. 돈을 내고도 그 돈 값에 해당하는 만큼의 맛이 없다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생각이 든다면 두 번 다시 그 음식점을 찾지 않지요. 음식점은 소문이 어떻게 나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도 그와 같습니다. 교회는 맛을 파는 음식점과 같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혼이 먹으면 살찌고 힘있게 되는 맛있는 음식을 파는 음식점입니다. 물론 그 영적인 음식은 공짜로 제공이 됩니다. 영의 양식도 구미에 당기게 맛있게 해서 팔면 누가 안 먹겠습니까? 교회가 소문난 집이 된다면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런 소문이 난 교회라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역사가 오랜 교회도 아닙니다. 이 교회는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유약한 교회입니다.
II.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멀리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거룩한 소문이라고 부른다면 그 소문은 무엇일까요?
8절에 의할 것 같으면, 그 거룩한 소문은 하나님을 향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까? 태어난 지 얼마 밖에 되지 않는 유약한 성도들에게 그런 큰 소문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핍박과 박해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믿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순교한 믿음의 영웅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던 그 때까지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요구할 정도의 큰 박해가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9절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의 일행을 통하여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전파되는 말씀은 힘이 있어서 데살로니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그 결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가 된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던 우상들을 버렸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듣자 우상을 버린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부처님을 믿는 불교 신자가 어떻게 자신이 의지하던 부처님을 한 순간에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보다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자신이 믿고 숭배하고 의지하던 신을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들이 믿고 있던 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바울이 전파하는 그 하나님이 참 된 분이며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에 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과의 단절을 선언할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는 상대방을 설득시켜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서 믿음 생활이 시작되어서 믿음 생활이 마치는 구원의 완성까지 성도들이 기다림의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 기다림의 생활은 어떤 생활이어야 합니까? 막연하게 하늘만 처다보면서 사는 생활이 기다림입니까? 평생을 그렇게 기다린다면 물론 예수의 강림이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우리를 지치게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성도가 평생을 사는 동안 해야 하는 일은 하늘만 처다보는 삶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세계로 들어온 후부터 하나님이 하늘로 부르시는 그날까지 순종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바로 이것을 깨우쳤습니다. 그들은 우상으로부터 돌아서는 그날부터 9절에 의할 것 같으면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한 평생 주님뒤를 따르면서 그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순종하라고 했으니 군소리 말고 따라 가야 합니까? 왜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알고 순종해야 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성도의 한 평생이 예수의 뒤를 따르면서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를 닮기 위해서 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왜 순종해야 하는지를 깨우친 사람들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케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닮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모습을 온전하게 닮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며 목표이며 고울입니다. 예수의 겉모습을 닮은 것이 아니고 예수의 정신, 즉 예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모습, 즉 예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 신앙의 고울입니다. 바울로부터 말씀을 전수 받고 예수 믿는 자가 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의 핵심을 바로 전수 받았습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의 핵심을 바로 전수 받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이 방향을 잃어 버리고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시장을 가면 돈 지갑을 들고 가야하는데 시장보러 가면서 가방 메고 간다면 그야말로 우수꽝스러울 것입니다. 비록 3주 동안 밖에 되지 않은 짧은 바울과의 교제 기간이었지만 신앙을 바르게 전수 받았기에 바른 길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걸울 수 있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신앙의 목적이 엉뚱한데 가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 오케이다식으로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번영의 신학에 물들어 있는 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기복신앙이라고 부르지요.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합니까? 예수 믿으면 그 믿음 때문에 가난이 없어집니까? 예수 믿으면 그 믿음 때문에 고쳐 질 수 없는 질병이 고쳐집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기울어져만 가는 사업이 그 믿음 때문에 기적적으로 회생합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목적은 예수를 닮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기복적인 신앙으로 착색된 신앙이기에 세상에서 입신출세하면서 세상의 부와 명예와 건강을 누리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 것들은 신앙의 목적을 바로 붙들고 신앙생활한다면 덤으로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객을 전도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신앙의 목적을 제대로 붙들고 신앙생활 해야 길을 잃지 않지요.
교회 생활하는 목적은 내 영혼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 궁극적인 닮아 가야할 최종적인 고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형상입니다. 내 안에 그 예수의 형상이 영글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까지 감당을 해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 교회라 할지라도 완전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완전하고 온전한 교회가 되려고 힘쓰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불완전함 때문에 성도들이 고통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지금도 빚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영혼을 빚어 가는 손길을 느끼지 못하니 고통만 크게 보이고 그래서 교회와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성장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최적의 기관이 지금 하나님이 주신 우리 교회라는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도록 하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본받을 뿐만 아니라 또 누구를 본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들은 바울의 일행을 본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 일행을 본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에 영적인 지도자들을 예배나 인도하고 설교나 하라고 세워주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교회에 영적인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그저 설교단위에서 서서 입을 벙끗 벙끗 벌리면서 설교나 하고 있으라고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를 통하여 평신도들이 주님을 섬기는 자세를 배우고 보고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 지도자로서 인격적인 결함이나 약점이나 상처들이 있다할지라도 주님을 진실되게 섬기는 그 모습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그렇게 바울을 닮아가려고 노력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교회마다 영적인 지도자를 주셨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런 영적인 지도자에게서 완전한 인격을 찾을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철저하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냥 부족하더라도 주님을 열심히 그리고 진실되게 섬기는 분이구나 하면서 주님을 섬기는 방법만 배우시면 됩니다.
III. 주님을 얼마나 본받았습니까? 얼마만큼이나 내 모습을 버리고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안에서 삶이 변화되고 주를 닮아 가는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늘어간다면 온 교회 공동체가 그런 변화된 사람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도 이 뉴우 잉글랜드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그런 거룩한 소문이 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거룩한 소문이 나야지요. 안 좋은 소문이 나서는 안되지요. 야 그 교회는 말도 마라. 날마다 싸우고 깨어지고 터지고 갈라지는 교회야! 이런 나쁜 소문이 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교회는 세인들에게 이런 소문이 자자하게 나면 좋겠다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야 그 교회에 가면 사람이 맛이 가버려! 그 교회가면 사람이 바뀌어 버려! 이런 소문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분들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소문을 냅시다. 소문이 나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를 믿고 삶이 변해가고 있다면 만나는 이웃들에게 예수를 증거합시다. 내가 예전에는 저렇게 살았는데 예수 만나고 나서부터는 이렇게 산다는 것을 증거합시다. 그리고 명백한 증거들을 삶을 통하여 보여 줍시다.
왜 예수를 닮아 가고 본 받는 일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우리의 일생이 길어봐야 70, 80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초로 같은 인생을 산후에 영원세계에 들어 갈 때에 가져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예수를 닮고 변형된 모습입니다. 우리의 예수 닮은 인격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영원세계에 들어갈 때에 이 모습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러니 현재의 나의 모습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얼마큼 예수를 닮았습니까? 현재의 나의 나된 모습은 과거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의 하루 하루의 삶이 순종과 헌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면 오늘 나의 인격은 예수를 더욱 닮은 빛난 인격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 불멸의 인격을 가지고 우리는 영원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를 닮아 가십시오. 그것이 마지막 내 인생 여정 끝내어 하늘 세계로 들어갈 때에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비록 어린 교회였지만 이 진리를 바울로부터 전수 받았고 그 전수 받은 날부터 영적인 성장이 시작되었기에 그런 거룩한 소문이 각처에 퍼지지 않았습니까? 평생을 신앙생활 했는데도 내 안에 형성되어 있는 예수의 모습이 갓난아기에 불과하다면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영적인 성장을 계속하십시오. 자라나십시오. 우리 교회에 다른 교회에 없는 좋은 프로그램이 많지 않습니까? 심령을 쏟아 부으면서 영으로 기도할 수가 있는 금요 찬양기도의 밤도 있고 화요일 수요일마다 진리를 가르치는 성경공부반도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읽기 모임을 만들어서 성경읽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모두 열심히 참여하여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십시요. 정진 또 정진하여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 닮은 하늘의 별같이 빛나는 인물들이 되십시다.보스톤 지역에 소문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 들어가서 소문은 냅시다. 거룩한 소문을 냅시다.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우리의 삶이 이렇게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자신있게 이웃에게 소개하고 이웃들을 교회로 이끌어 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