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February 2, 2020
설교자:
Passage: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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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시력은 좋아서 잘 보지만, 보기는 잘 했지만 사리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분들을 청맹과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당달봉사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맹인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을 맹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청력은 좋아서 온갖 소리가 다 들리지만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자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은 신종 귀머거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의외로 우리에게는 이런 맹인들과 이런 귀머거리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내가 믿기 편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들어 내고
마음에 드는 말씀 골라 자기에게 이롭도록 해석하니
내가 믿기 편한 방식으로 나를 위한 예수님을 만들어 내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없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면 복음을 함부로 변질시키는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내 입장, 내 방식을 투사해서 성경 말씀을 읽는 일은 차라리 성경을 읽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내 방식, 내 입장으로 읽은 성경 말씀이 내게는 고정관념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면 참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II.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신들의 독특한 눈과 시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헬라인들입니다. 헬라인이란 혈통적으로 그리스 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이란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 말로 헬라인을 정의한다면 세상 고등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foolish하다, 즉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기에 그 십자가 안에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통하여 사물의 근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성적인 눈에는 십자가는 천하기 그지없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부류의 사람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성으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신앙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척도도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행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메시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메시야라고 볼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대를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게 맥없이 나무 위에서 죽었던 나사렛 출신의 목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메시야로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 번째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까?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처럼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틀에 달리어서 죽었습니다.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들은 자랑합니다. 왜냐고요? 23절과 24절 말씀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현재 영적으로 멸망 당하여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현재에 얻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어서 십자가가 미화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처절한 십자가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스럽게 죽어 가는 처형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저 뒤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피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저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어서 죄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속박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런 죄의 속박을 부수고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 주는 권세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십자기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여서 로켓을 쏘아서 지구를 벗어 나서 달로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로켓이 지구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구가 끌어 당기는 중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로켓은 땅으로 떨어 집니다. 굉음을 내면서 로켓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중력을 뿌리치는 가속도를 내면 지구의 중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요.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은 우리를 나락으로 잡아 당기는 죄악의 권세를 뿌리치는 능력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유혹하면서 나락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진입해 있습니다.
찬송가 23장 4절에는 이런 가사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내 죄의 권세 깨뜨려 그 결박 푸시고 이 추한 맘을 피로써 곧 정케 하셨네 아멘!
두 번째로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두가지는 서로 대척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있는 공의라는 속성은 인류를 그대로 멸망시키라고 주장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계시는 다른 속성인 사랑은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딜레마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도 100% 만족시켰고 하나님의 사랑도 100%만족시켰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unique)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뿐이면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가 지었던 죄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은 죄를 말로 면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서 피흘리고 죽었기에 그 댓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5: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물건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전도입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에서 솟아난 지혜인, 유교, 도교, 불교, 또한 스스로 계시의 종교라 자처하는 이슬람교도 그들 자체의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세상 지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닫고 믿고 안 자들이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수 할 때에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땅끝까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세상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참 미련한 방법이지만, 전도 외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올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어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 불신 세계로 가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에 성령 불이 꺼져 가고 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교회가 성령으로 불타 오르기를 바라고 소원할 뿐입니다.
III. 말을 맺겠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능력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우리의 삶을 끝내고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생겨난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의 바람 같은 성령은 교회 밖, 불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며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가슴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들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 명령 따라서 내가 깨달아 알게 된 십자가의 도를 불신 이웃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미련하기도 하고 우직한 방법인 개인 전도를 통하여 적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타겟을 정하고 기도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