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사명

January 13, 2019
설교자:
Passage: 이사야 43:1-13
Service Type:
  1. 서 론

이사야서를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이사야서 1-39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주전 8세기 이사야이고 이것을 제 1 이사야라고 부르지요.  40-66장까지는 바벨론 포로 가운데 있는 익명의 예언자가 기록한 말씀인데 이 예언자를 제 2 이사야라고 부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제 2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주전 8세기 예언자인 예루살렘의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죄악을 지적하는 심판 선포가 대부분이지만, 이사야 40-66장까지의 제 2 이사야의 글은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와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주종을 이룹니다. 바벨론 포로 공동체 안에서는 이미 그들의 지은 죄로 인하여 고통을 톡톡히 받았기에 그런 백성을 향하여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제 2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사건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 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출애굽 사건이라고 부르지요. 이 사건은 조상들로부터 자식들에게로 대대로 이야기 형태로 전해져 내려 왔습니다. 이것을 출애굽 전승이라고 부르지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결코 잊히질 수가 없는 구원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여서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70년 동안이나 그들은 포로가 되어서 자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고달픈 포로 생활이 마쳐지고 있음을 제 2 이사야는 선포했습니다. 제 2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공동체를 향하여 이제는 그 노역의 때가 지났고 그 모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면서 구약의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소망을 주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마침내 고레스 왕의 칙령이 선포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해방이 선포되고 신실한 믿음이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서 망가진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재건하게 되지요. 이것을 신학적으로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제 2의 출애굽이라고 부르지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엄청난 구원 사건이 바벨론 포로 상태에 있는 구약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게 되었지요. 바벨론 포로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제 2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구원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이 구원사건은 어떻게 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 말씀에는 적혀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잊히어 질 수가 없는 출애굽 사건과 제 2의 출애굽 사건! 오늘 우리들, 신약의 백성들은 이 두 사건 보다 더욱 큰 구원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 사건을 우리는 경험한 세대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능가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우리 인생들을 죄와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서 건져 내는 엄청난 구원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자손 만대까지 이야기 형태로 전승되어져야 하는 사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신약의 백성들인 우리들에게 이런 구원의 복을 주셨는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우리는 오늘 제 2 이사야의 본문을 통하여 들어댜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런 큰 구원 사건을 경험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단수 이인칭 대명사, 너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야곱의 후손, 즉 이스라엘 백성, 곧 구약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와서 포로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고 있는 구약의 백성들을 가리키지요.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신약의 백성들인 우리들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렇게 사랑하시는가? 그 대답을 아시는 분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왜 이러도 사랑하시는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들은 참으로 어떻게 보면 야곱의 후손답게 얼마나 얄미운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변함 없이 항구여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자기 전에 꼭 물을 마시고 자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잠 자기 전에 아빠가 늘 물 한잔을 아이에게 갖다 주어서 마시게 했습니다. 물을 마신 다음에 몇 분 지난 후에 아이가 또 아빠를 불렀습니다: 아빠 물 한잔 만 더 갖다 주세요. 아까 마셨잖아? 물 많이 마시면 자다가 쉬한다 그만 자! 또 몇 분 지나자 아이가 또 아빠를 불렀습니다. 아빠 목말라서 잠이 안와요. 물 한 컵만 더 갖다 주세요. 짜증이 난 아빠가 “아까 말했잖아. 물 많이 마시고 자면 오줌싼다고 빨리 자!” 그 다음에 무슨 말 하겠어요. 한 번만 더 조르면 맴매 한다. 맴매가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3분이 지난 후에 또 다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 맴매 하러 오시면서 물 한 잔 가져다 주시면 안되겠어요?

이런 상황이라면 제 새끼일지라도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일 순간 얄밉다라는 생각이 안드십니까?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구약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유배지에 끌려 와서 비참한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눈에 밉깔스럽게 놀다가 하나님의 매를 맞아서 그런 지경이 되었지요.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징계를 했지만, 막상 또 그들이 그런 비참한 상황에 있으니깐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전라도 사투리로 짠 하지 않겠어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구약의 백성들을 선택하여서 온갖 사랑을 다 부어 주었는데 현재 상태는 말이 아니니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비참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음성을 들었습니까?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내것이다. 너는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은 구약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소리이지요. 이것은 동시에 신약의 백성들인 우리들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실 밖에 없는 이유는 보배로운 자들이고, 존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큼 사랑하고 계실까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아니 매순간마다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깨달을 때에 비로서 느끼게 됩니다.

 

창조와 구속이라는 큰 주제가 1절에 모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손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해와달과 별들과 산들과 바다와 그 가운데 삼라만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했지만, 인생들은 하나님의 손이 수고해서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인류는 창조의 면류관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이 손으로 만드시고 소유했습니다. 그렇기에 온 천하를 주고도 한 사람과 안 바꾸겠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인생들을 아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얼마의 사람들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한 사람들을 무엇하기 위해서입니까? 구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했다고 했는데, 그 구속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보통 구속이라는 단어는 죄를 지어서 감옥에 구금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구속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들을 구원했다라고 선언한다면 구원했다라는 동사는 save나 deliver나 rescue가 됩니다. 구원이란 위험에 처하여 있는 사람을 그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내고, 건져 내는 것을 가르킵니다. 그러나 구속이라는 말은 노예 상태로 예속되어 있는 사람을 그 노예상태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몸값을 지불하고서 그 노예를 해방할 때에 구속했다라는 말을 씁니다.

예를 들면 수영을 못하는 노예가 물에 빠져서 죽어 가고 있을 때에 그를 물에서 건져내는 것이 구원이고, 그 노예가 가엾게 생각되어서 돈을 지불하고서 노예로부터 신분을 자유민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을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빚에 쪼들리게 되면 자식들을 부자들의 집에 종으로 팔아서 노예살이를 시킵니다. 그런데 그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일가친척이 돈을 들여서 그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친척을 되삼으로써 그를 노예로부터 해방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법으로는 부자 친척이 해야하는 의무입니다. 이런 행위를 구속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구원하는 사람을 구속자라고 부르지요. 히브리 말로는 고엘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redeemer라고 부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 즉 구약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값을 치르시고 해방했고, 또한 구약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을 때에 그들을 풀어서 해방시켰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나 구스나 스바를 희생해서 이스라엘을 건지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신약의 백성들인 우리들은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나요? 구약의 백성들이 받았던 사랑보다 더욱 큰 사랑을 받아서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죄에 묶여 있는 우리들을 그 죄로부터 풀어내고 해방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는 댓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내 놓았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면서도 무엇이라고요? 우리의 구속입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기록해 주신 말씀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엄청난 희생을 우리 하나님이 취르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로 인한 하나님의 소유뿐만 아니라 또한 구속으로 인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이중적인 우리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창조로서 그냥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속으로 우리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인가요? 아니면 세상 불신자들일까요? 우리에게는 약점도 단점도 많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눈에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존감을 회복할 필요가 있겠지요. 우리들이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우리는 당당한 주의 자녀들임을 잊지 마십시요.

둘째로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큰 구원사건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신 또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전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 증인으로 삼았습니다. 증인으로 삼았으니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면, 하나님의 복이 부어지면, 거기에는 반드시 사명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이 땅을 떠나갈 존재가 아니라 사명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크신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한 평생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 내야 합니다. 이런 삶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삶이 아니라 반드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열등감, 우리의 상처가 복음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처난 마음이 치유됨으로 그냥 마냥 기쁘기만 합니다. 이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마냥 그 자리에 있지 말고 이제는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바랍니다.

어떤 성도의 경험입니다. 그 분은 머리도 명석하고 신앙도 탁월한 분입니다.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했기에 학교를 졸업하면 신학 교수가 되겠거니 하면서 주위에 있는 분들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더니 열악한 제 3 세계로 선교사로 떠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두다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그 분이 그런 결정을 내린 배후에는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답니다. 하나님 나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그런 진부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 하나님 나는 누구의 종입니까?라는 기도를 드리다가 응답을 받았답니다. 너는 내 종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자기의 주장이 없습니다.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오면 오는 존재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따라 사는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의 노예요, 예수의 종이라는 소리를 우리 주님으로부터 들었을 때에 미련 없이 탄탄한 미래를 버리고 종으로 낮은 위치로 섬기러 내려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라고 하신 이 길, 진리의 길, 복음 전도의 길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선교의 길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 상반절을 보십시요: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왜냐하면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우리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들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당하는 모든 시련, 즉 불 같은 시련, 물 같은 시련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이런 유형의 약속을 우리 주님께서는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에 그의 제자들에게도 약속해 주셨지요.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가서 땅의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셨지요. 그리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내가 주의 명령을 따라서 주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전파하는 동안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이와 같이 지키시겠다는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III. 말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했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면서 그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나게 큰 사랑을 받은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의 피로 우리를 사서 우리를 구속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이중적인 소유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약점과 단점과 어두움이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열등감을 정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증인이 되는 삶을 한 평생 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기까지 인생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하는 사명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는 21세기의 사람들! 우리는 20세기와 22세기를 연결하는 한 징검다리돌로 한 세상 살아 갈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막16:15절에서 다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